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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 목사

중앙일보 2011.09.03 01:30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쉰이 넘은 아들은 3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아직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일제 치하 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인 아버지는 대중에게는 친숙했지만 아들에게는 먼 이름이었다.


“내가 용서한다고 하면
싸구려 소설이 될 뿐이다 ”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52) 목사가 지난주 LA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추모 기념 강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코네티컷주 맨스필드라는 시골 마을에서 12년째 목회자로 살고 있다. 평일에는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설교한다. 원치 않았던 산행에서 실족한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아직도 응어리다. 의문사에 대해 그는 “마치 아버지 이름 위에 검은 사인펜이 칠해져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사인펜을 지우듯 분노를 씻고 나니 비로소 아버님의 삶이 보였다”고 말했다.



LA중앙일보=정구현 기자









고 장준하 선생







#씻고 싶은 기억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은 무더웠다. 1975년 8월 17일 일요일이다. 장 목사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그날을 한 장 한 장 기억한다”고 표현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또렷하게 떠올리기 어려운 기억이다.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내가 받았고, 내가 가족 중 처음 현장에서 돌아가신 모습을 봤다. 어떻게 잊을 수 있나.”



 아버지가 산에 가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전화벨이 울렸다. 상대방은 누구라고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한마디하고 끊었다. ‘장 사장님(장준하 선생)이 등산 중에 많이 다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모셔가셔야 하겠습니다’가 전부였다.



 부랴부랴 택시를 대절해 어머니를 모시고 포천으로 향했다(장준하 선생은 경기도 포천 약사봉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됐다). 어머니를 산 아래 두고, 경찰과 네 시간 동안 산길을 헤맸다. ‘야호’ ‘여보세요’ 외치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났고, 현장으로 안내됐다. 아버지는 들것에 뉘여 있었다. 얼굴에는 평소 산행에 가지고 다니던 수건이 덮여 있었다.



●당시 무슨 생각이 들었나.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평소처럼 누워 계실 뿐이었다(당시 장준하는 요양 중이었다). 그런데 속에서 뭔가 불같이 치밀었다. 10대의 치기 어린 생각이 들었다. ‘복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사망 원인을 모르지 않았나.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아버지는 항상 형무소에 갇혀 계시던가, 도망 다니셔야 했다.”



 ‘민족의 일’에 바빠 아버지라고도 제대로 불러 보지 못한 부친이었다. 다들 선생이라고 하니 그도 선생이라고 불러야 했다. 74년 12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가석방으로 풀려나 집에서 요양하던 힘 빠진 아버지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매일 산에 오를 수 있는 행복을 맛보던 때였다. 그는 그 기억을 씻을 수 없었다.



#씻기 위한 선택



 가장이 죽고 난 집안의 삶은 어려웠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창간한 월간지 ‘사상계’가 폐간되면서 이미 빚을 지고 있었다. 독립투사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보험 외판원으로 나섰다.



●사는 일이 힘들었겠다.



 “제가 기억하는 것만 입대 전 스물한 살 때까지 30여 차례 이사했다. 어머니는 씩씩한 분이다. 아버지가 쫓겨 다니실 때도 항상 식객이 많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손님들을 대접했다. 60~70년대 어머니 밥을 먹지 않은 야당 정치인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찾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도 정부의 감시는 가족을 내내 괴롭혔다. 학교에서는 그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취급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대학은 갔지만 그마저도 그만뒀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이 터졌다. 그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군대에서도 특별취급 대상이었다. 전방에서 근무했으니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있었다. 그의 상관들은 그가 언제 사고를 낼지 불안해했다.



●군대에서 뭘 배웠나.



 “어느 날 밤 보초를 서는데 휴전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이 굉장히 아팠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때서야 밀려오는 듯했다. 이 휴전선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한다면 없앨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대 후 그는 목사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향했다. 응어리를 씻기 위한 선택이었다. 거기서 마약 중독자를 상담하고, 태국 난민들을 전도했다. 그는 ‘낮은 자들을 위로하던 아버지의 정신이 내 핏속에 있다’고 표현했다.



 “4년간의 타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를 목사로 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여전히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었다. 나 자신의 목회를 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9년이었다.”



 그 후 12년간 그는 코네티컷주 시골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다.



#씻어야 사는 삶



 그는 목사다. 그런데 머리를 기른다. 멋을 위해서가 아니다. 머리가 20㎝ 이상 자라면 잘라서 소아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기부한다. 한 번 자를 때마다 2년씩 걸렸고, 이번이 세 번째다.



 그는 목사다. 그런데 직업이 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400달러만 받는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스쿨버스 운전사다. 지난 4년간 하루 평균 9시간씩 주 5일 운전대를 잡아왔다.



●왜 버스 운전인가.



 “여긴 시골이라서 숲이 우거진 길이 무척 아름답다.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버스 운전만큼 좋은 게 없다. 혹시 생각 있으신 목사님들께도 버스 운전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돈도 받고, 기도도 하고,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버스에 타고 내리는 아이들의 웃음도 덤으로 얻는다.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계속한다(웃음).”



 그는 목사다. 그런데 그가 담임으로 있는 ‘스토어스 한인교회’는 좀 다르다. 일요일이 아니라 평일에 예배를 본다. 또 장로나 집사도 없다. 한술 더 떠 동성애자의 교회 출입도 허용한다. 그는 ‘융통성’이라고 표현했다.



●당신은 구원을 전하는 목사다. 만약 아버지 죽음이 타살이라면 그들의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용서한다고 한다면 싸구려 황색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된다.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아버지의 삶이 좀 더 깨끗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씻기지 않는 의혹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부는 등산길에 실족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3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죽음은 의혹투성이다.



 ‘장준하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의문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계획에 없던 산행이었다. 섭씨 36도의 폭서를 기록한 날이었다. 항상 산행에 동행하던 지인들에게도 오늘은 쉬자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행을 권유한 이들의 증언은 엇갈린다.



 두 번째는 검시 결과다. 추락사했는데도 시신에 골절상이 없다. 실족한 곳은 경사 75도에 높이 16m에 달한다. 상처는 더 의문이다. 오른쪽 귀 뒤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 함몰되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양팔 겨드랑이에 피멍이 있고, 허리 부분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다는 소견이다. 장준하 선생의 친구이자 주치의인 조광현 내과의는 “아무리 양보해도 추락사일 순 없다”고 했다.



 가족은 당시 현장검증조차 없었다고 했다. 당시 정국의 대칭점에 있던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가 조사 자체를 막았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누구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도요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 신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그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비서로 활약했다. 귀국 후 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했으며 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신민당 소속으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이 됐다. 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나 75년 사망했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저서에 『돌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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