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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2. 서쪽에서 온 마을 (2)

중앙일보 2011.09.03 01:30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어이없게도 감찰 나온 사람 눈이 멀어버렸다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돌개바람에 휘감겨 빨려 올라간 공중에서 정신없이 몇 바퀴 돌았던 것 같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환청이었을까. 공포에 질린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크기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소름이 끼쳤다. 두어 바퀴쯤 더 돌며 떠오르던 몸이 멈칫했다. 오목가슴이 메슥거리면서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풀썩!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말고삐를 그러쥔 채로였다.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의식은 그믐날 밤 등잔불처럼 또렷한데 몸이 굳어버렸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다. 눈조차 떠지지 않는다. 아니다. 눈은 분명히 떴는데 사방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리 캄캄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일 수가 있을까. 불현듯 어쩌면 내가 지금 죽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죽고 거기서 빠져나온 혼백이 떠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보여야 한다. 내동댕이쳐진 내 몸뚱어리가 보여야 한다. 그런데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날숨이 터진다. 들숨도 쉴 수 있다. 나는 살아있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본다. 촉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인보야, 인보 어딨느냐?”



내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내 귀에 울렸다. 그렇다. 나는 소리도 낼 수가 있었다.



“지밀 승정!”



 울먹이는 인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보가 있다. 우렁우렁한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다.



“그래, 우리가 살아있구나.”



나는 인보의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손을 휘젓는다. 좀 있다 인보의 두툼한 두 손이 내 손을 부여잡는다. 처음 잡아본 인보의 손은 따뜻하다. 늘 불퉁거리는 어투와 대조적이다. 고맙고 반가운 체온이다.



“세상에! 미, 믿을 수가 없어요.”



인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난생처음 보는 용오름 현상입니다.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날 수가 있지요? 집채 덩이라도 빨려 올라갔을 겁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넌 그 바람에 휩쓸리지 않았더냐?”



“가까스로요.”



나는 그때까지도 그러쥔 말고삐를 당겼다. 쉽게 빨려왔다. 두 손으로 고삐를 더듬는다. 그 질긴 가죽 줄이 두어 자 길이에서 뭉뚝 잘라져 있었다.



“내 말은? 내 말은 어딨느냐?”



“바로 옆에요. 떨어지면서 돌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했습니다. 승정 목숨이 붙은 건 전적으로 부처님 가핍니다.”



“아, 이 무슨 변괴인고.”



나는 손으로 자갈밭을 더듬는다. 말갈기가 손에 잡힌다. 더 더듬으니 물기가 묻어난다. 여기까지 나를 태우고 왔던 늙은 말의 눈이다. 눈을 뜬 채로 죽었다. 말이 나 대신 죽은 것 같아서 애처롭다.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닫히지 않는다. 나는 합장하며 왕생극락을 빌었다.



“내 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안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여.”



“정말요? 정말 안 보여요?”



“그래, 안 보여.”



“겉으로 봐선 멀쩡해요.”



“그런데 왜 이러지?”



인보가 내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누이고 뒷목과 어깨를 주무른다. 혼이 빠져 달아날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눈이 안 보일 수가 있다니.



나는 그간 눈으로 책을 읽으며 진리를 캐왔다. 부처를 꿈꾸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다. 중생의 삶이란 내남없이 식(識)의 흐름으로 이뤄져 있다. 식이란 어떤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 6식을 가리킨다. 이 6식은 그 대상이 밖에 있다. 그런데 대상을 인식하는 자아 자체를 인식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제7식으로 말라식이다. 밖으로도 안으로도 드러나지 않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잠재의식은 제8식으로 아라야식이다.



만물은 이 여덟 가지 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만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원인과 결과의 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고정된 실체들이 모이거나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변화가 있고 변화는 인과법으로 얽힌다.



내가 지각하는 대상이 공(空)이라는 걸 깨달으면 인과법이 지배하는 세상과는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이 경지에 다다르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존재를 떠난다. 더 이상 8식이 흐르는 중생의 삶이 아니다. 불보살의 세계인 것이다.



나는 불보살이 아니다. 어김없는 중생일 뿐이다. 하여 나는 식을 통해 살아간다. 우선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 눈은 그래서 보배 중의 보배다. 그런데 그 눈이 보이지 않는다.



후두두둑-.



장대비가 쏟아졌다. 시원했다. 눈을 크게 뜬다. 빗물이 눈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보이는 건 없다. 수행자에게 장애는 도리어 약이 된다. 껍데기를 버리고 진리를 붙드는 계기가 된다. 나는 마음을 바루었다. 인보 앞에서 의연한 자세를 갖추려고 애썼다.



“일단 마을로 내려가죠.”



인보가 나를 일으킨다. 나는 휘청거린다. 보이지가 않으니 좀처럼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말을 묻어줘야 할 텐데.”



“나중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와서요. 우선 이걸 쓰세요.”



인보가 내 머리에 뭔가를 씌워준다. 갈모다.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모자인데 이 장대비 속에서 배겨날 것 같지가 않다.



“너나 써라. 멀쩡한 네가 써야 옳지.”



인보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자기 말에 나를 태우고 터덜터덜 걸어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비는 곧 그쳤다.



“우리가 넘어온 쪽은 아직도 퍼붓고 있는데 내려가는 마을 쪽은 햇살이 쨍쨍하네요.”



인보가 일러주었다.



“여름날 산중에서 만나는 소나기는 소 등에서도 갈린다질 않더냐.”



나는 아까 그 용오름을 떠올린다. 무슨 조홧속으로 그런 돌풍이 내 쪽으로만 불었던 걸까. 말은 죽고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소름 끼치던 그 웃음소리는 누가 낸 걸까. 나는 인보에게 말하지 않는다. 나만의 환청일 수도 있으니까.



 “평지가 나왔더냐?”



“거의요. 작은 방죽 옆을 지나가고 있답니다.”



“마을은?”



“아까 고갯마루에서 보던 큰 마을은 아직 멀었고 띄엄띄엄 작은 마을들이 있군요. 협착해 보이던 산중에 논밭이 제법 넓게 풀어졌어요.”



“계수관은 이곳이 살기 좋은 터로 꼽힌다지 않더냐. 숨어 살기에는 더더욱 좋고.”



나는 지도에서 보았던 청림(靑林) 고을을 떠올렸다. 중첩한 산속 쇠뿔바위 아래로 터 잡은 마을은 삼거리까지 이어졌다. 폭포가 있는 곳까지 크고 작은 산촌이 계곡 구석구석에 박혀 있었다. 관청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칠백여 호에 이른다고 했다. 한 집을 다섯 식구로 잡으면 삼천 명이 넘었다. 폭포 넘어 남쪽 내소사 일대는 빼고 내변산만 쳐서 그렇다고 한다.



“삼거리 마을에 다다랐는데요.”



“오른쪽으로 가야겠지. 쇠뿔바위 밑에 공방이 있다고 했다.”



“이제 좀 보여요?”



“전혀.”



개가 짖었다. 조잘대는 꼬맹이들 소리도 들렸다. 비를 쫄딱 맞은 낯선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자 졸졸졸 따라붙었음에 틀림없다.



“얘들아, 공방이 어디냐? 경판 새기는 공방을 찾는다.”



인보가 물었다.



“저기요. 저기 높은 이층 누각요.”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흔들리는 말 잔등 위에 짐짓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커다란 돌배나무 세 그루가 있는 집이로군요. 이백 보쯤만 더 가면 됩니다.”



인보가 갑갑한 내 속을 헤아려 자세히 일러줬다.



“김승의 공방이 아니라 의원부터 찾아가야 옳은 것 아니냐?”



“이따 부르면 되죠.”



“우스꽝스럽구나.”



“마을이 잘 가꿔져 있고 집들은 반듯반듯합니다.”



“내 꼴 말이다.”



나는 강화도 대장도감이 파송한 감찰 신분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감찰 나온 사람 눈이 그만 멀어버렸다. 무엇이 보여야 조사를 하고 따질 게 아닌가. 내 눈앞이 이처럼 캄캄한 주제에 무엇을 조사한단 말인가. 김승은 내가 겨룰 상대다. 나는 그의 놀림감이 되기 싫다. 초장부터 절대로 얕잡아 보여서도 안 된다. 강화도를 떠나오기 전, 나는 대장도감 동료들 앞에서 천명했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진선진미한 대장경 경판이 되도록 반드시 바로잡고 오겠노라고.



“천재지변이었어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사고였다고요.”



인보 말이 옳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필이면 마을이 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왜 우리가 당하느냔 말이다.”



“김승이 일으킨 것도 아니잖아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명백한 사실을 왜곡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걸지도 않았던 십자가 목걸이를 신성한 경판 판화에 새겼다. 사실을 왜곡하는 자는 대개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이념적 가치를 위하여 남을 속이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편견을 의식하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어떤 부류의 인간일까. 그가 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화상의 얼굴을 확인할 눈이 이렇게 멀어버렸다.



“어디서 오는 스님들이쇼?”



인보보다 더 굵고 탱글탱글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그냥 우렁우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쇳소리가 섞였다.



“강화도 대장도감에서 내려온 승정 지밀이다. 김승 스님을 찾아왔다.”



내가 목에 힘을 주며 위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볼 수 없으니 위엄이 반감되리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선 숙소로 가쇼. 빗길에 나자빠지셨나? 옷이 찢기고 몰골이 말이 아니네.”



 내 옷이 찢겼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인보는 그걸 말해 주지 않았었다. 하긴 눈이 먼 판국인데 그깟 옷 찢긴 걸 말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김승을 만나지 않고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씻으쇼. 점심 자시고 노닥거리다 보면 촌장 어른이 올 테죠.”



 쇳소리 목청을 지닌 사내는 발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인보가 세숫물을 대령했다. 얼추 씻고 나서 바랑의 여벌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인보의 채근에 못 이겨 자리에 누웠다. 인보는 따뜻한 차를 얻으러 갔다. 누워서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래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온 병통인가. 병통은 본디 있지도 않았다. 나의 몸, 나의 눈 또한 본디 없었다. 그런데 없던 병통이 찾아와 없던 눈을 멀게 했다. 나는 지금 눈이 먼 상태로 여기에 누웠다. 이건 허깨비인가, 실체인가. 모든 건 마음이 지어내는 것, 나는 내 마음을 조율하여 눈먼 병통을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경지에 든 수행자다. 나는 의심스럽다. 내 적공(積功)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마음이여, 본래 마음자리는 담연(湛然)하다. 깊고 맑아서 먼지와 티끌이 잘 묻는다. 우선 더럽혀진 내 마음자리부터 쓸어내자. 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 뇌를 자극하려고 구강과 비강이 울리게 발성했다.



인보가 돌아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눈에 좋다는 결명자차를 달여 왔다. 그가 나를 일으켜 앉혔다.



“찻종지가 무슨 색깔이더냐.”



“흰색입니다.”



나는 찻종지를 만져서 모양을 헤아린 다음 의식적으로 붉은 빛깔을 채워 넣었다. 연상작용은 쉽지가 않았다. 찻종지도 검었고 거기 담긴 차 빛깔도 검었다. 나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호흡을 골랐다. 더운 찻종지를 두 손으로 감싼 채였다.



“어서 마시지 않고 뭐합니까?”



“내 마음이 창광(猖狂)하여 마치 미친개가 사납게 날뛰듯 한다. 찻종지도 찻물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안 마시려고요? 입으로 마시면 몸으로 들어가요.”



내가 인보 성격을 타고났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나는 네가 아니다.”



“까다롭기는 나 원 참! 그런 소리는 이따 의원이 오면 그 앞에서나 해요!”



인보가 찻종지를 내 입에 갖다 대고 기울인다. 나는 엉겁결에 찻종지를 비운다.



“이런 거 마시고 눈이 떠질 것 같았으면 애초 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주문은 왜 외웠어요?”



“네 놈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또 도졌구나. 중이 염불하는 것도 흠이더냐?”



“관두죠. 나니까 모시고 다녀요. 아플 때만이라도 좀 무던해져 봐요.”



“눈먼 상관, 여기다 내쏴버리고 가지 그러느냐.”



인보가 나를 부축해 누인다. 내가 대꾸하려고 입을 연다. 그가 내 입을 우악스런 손으로 틀어막는다.



“지기 싫어하는 그 성격 잘 알겠는데요. 그 몸을 하고서 자꾸 말하면 기운만 빠져요. 지밀 승정 마음이 창광한 게 아니라 그 입이 더 창광해요.”



옳은 걸 옳다, 그른 걸 그르다 말하는 게 뭐가 창광한 것인가. 논리적인 말싸움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소설가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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