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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한국에 시집 온 ‘일본문화연구회 오아시스’ 대표 선곡유화

중앙일보 2011.09.03 01:30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자그마한 체구, 가녀린 선. 후나타니 유카(船谷由花·46)는 전형적인 동양 여인이다. 그런데 걸어온 길이 장난 아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뒤 1994년 한국인 생태학자를 남편으로 맞았다. 97년 한국으로 귀화한 뒤에는 수필가, 통·번역가, 강사, 교재 집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4년엔 아예 ‘일본문화연구회 오아시스(Oasisu)’를 세우고 왕성한 한·일 문화교류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마다 수차례 일본 문화교류 연수를 기획하는가 하면 개천절 음악제, 다산 정약용 탄생 기념행사 등에 참석해 노래를 하고 시조를 읊는다. 그것도 반드시 일본전통 의상인 기모노 차림으로. 그녀는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난 우주인 … 한·일 양국 아름다움 다 안고 싶어요”

 “제 정체성이 뭐냐고요? 저는 우주인이에요.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 두 나라의 아름다운 점을 모두 끌어안고 싶기 때문에 그냥 우주인이라고 해요.” 명함에도 일본 이름과 그 한자음을 그대로 풀어낸 ‘선곡유화(船谷由花)’라는 한국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홍 가(家)네 맏며느리로 산 지 16년. 그녀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상대의 참모습을 알고 좋아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최고급 기모노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내내 온화하게 웃더니 일본 정치권 이야기가 나오자 “무식합니다!”고 호통을 쳤다. 늦더위 속 추상 같다.



글=이소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gang.co.kr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했는데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92년 4월 부활절 날 교황 바오로 2세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어요. 아는 수녀님이 기회를 주셨죠. 다음 날엔 사순절 동안 금식하신 교황을 위로하며 일본 가곡을 불러 드렸어요. ‘해변의 노래’라는 100년도 더 된 곡이었는데 교황께서는 또렷한 일본말로 ‘아리가토 유카(고마워 유카)’라고 하셨어요.”



●베르디국립음악원에서 성악가 김동규씨와 함께 공부했다던데요.



 “당시 유학생들은 마에스트로 앞에서 ‘네네’밖에 못 했는데 김 교수님은 유일하게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학생이었어요. 공연 때문에 수업에 빠질 때면 ‘유카!’ 하고 부르면서 제 옆에 딱 붙어 앉았어요. 노트 빌려 달라고요. 성격이 워낙 활발해 우리가 ‘돈 조반니’라고 불렀어요(웃음). 한국 유학생들은 정이 많아 음식도 잘 만들어 줬는데 김 교수님은 불고기를 콜라로 재워 다들 ‘우와~신기하다!’ 그랬죠.”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남편은 일본 히로시마대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에 있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대학 앞에서 식당을 운영했는데 식사를 하러 오면서 얼굴을 알게 된 거죠. 하루는 아버지가 ‘우리 딸이 이탈리아에서 성악 공부를 하는데 펜팔이라도 하지 않겠나?’라고 권하셨대요.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는 남편의 모습에 반하셨던 모양이에요. 남편은 그날 바로 일본어로 편지를 보내왔어요. 얼굴도 보기 전에 편지로 사귄 거죠.”



●어떤 점이 그렇게 좋던가요.



 “아주 성실하고 자신감이 넘쳤어요. 전 사실 남편이 제일 어려워요. 늘 따끔한 충고를 해 주거든요. 하지만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신중한 조언이라서 동반자로서 믿음이 깊어요.”



 남편은 식생학계에서는 명성이 높은 홍선기 목포대학교 교수다. 신안군 다도해 일원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지난해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유네스코 위원으로 위촉됐다. 남편은 목포에서 학문을 하느라, 부인은 전국을 돌며 예술을 하느라 한 달에 만날 수 있는 것은 고작 두어 번. 남편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휴대전화 문자와 전화로 애틋한 연애를 한단다. 만나면 가끔 소주 한 잔씩 하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를 위한 일이니 힘을 내자”고 서로를 위로한다고.



●성악은 왜 그만뒀나요.



 “유학 시절에 독일 평론가 한 분이 제 노래를 듣고 나서 CD를 하나 던져 줬어요. 조수미씨의 ‘밤의 여왕 아리아’였어요. 그걸 듣고 ‘아, 노래는 그냥 이 사람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가 죽었달까요(웃음). 한국 성악가들은 기가 세고 아주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정말 그 이유 때문 인가요.



 “시어머니도 성악가예요. 하지만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고 나서 두 아들을 키우며 집안을 이끌기 위해 무대에 서야 했죠. 우리 시어머니 음반이 하나 있는데 그건 눈물 없인 못 들어요. 남편이 처음에 제가 무대에 서는 걸 꺼린 것도 그런 어머니를 봐 와서 그래요. 저도 ‘우리 집에 스타는 (시어머니) 하나다’는 결심이 섰죠. 그 후론 미련 없어요.”



●그래도 결혼 뒤 작문이나 번역 활동을 활발히 하셨네요.



 “예술을 하고 싶은데 조용히 할 수 있는 건 글이니까요.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완전히 전업주부였어요. 어느 날 시어머니가 절 부르시더니 ‘유카야, 네 재능은 많은 사람하고 나누라고 부모님이 선물해 주신 거다. 사회에 나가 좋은 일 많이 해라’고 하셨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98년 중학교 방과후 교실 일본어 교사를 시작으로 번·통역, 경인교대 평생교육원 강사 일을 하고 있어요.”



●한글서예전에도 꾸준히 작품을 내고 있던데요.



 “한글은 24가지의 단순한 글자로 무한대 소리를 표현해 내는 신비로운 언어예요. 한 획, 한 획 써 가는 순간마다 긴장과 호기심이 교차하죠. 아침에 일어나 먹을 갈 때면 먹물이 반짝반짝 빛나요. 붓을 잡으면 붓이 ‘놀아 보자’고 하는 소리가 들리죠. 그때는 모래성을 쌓으며 집중하는 아기의 마음이 됩니다. 그 느낌, 알 것 같나요?”



●알 것 같기도 하고…. 감수성이 정말 뛰어나신 것 같아요.



 “저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예술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 유학 때도 친구들은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는데 저는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 쓰면서 음을 음미해야 성이 찼어요. 그 음이 흐르는 오페라 장면을 떠올리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선생님들은 제게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 대신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했어요. 그땐 서운했는데 정확한 평가였던 거 같아요.”



 그녀는 2009년 박목월의 시 ‘나그네’에 낙관을 찍어 처음으로 한글서예전에 출전했다. ‘정아(靖雅)’는 서예 선생님이 지어준 필명이다. 올해도 30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한글서예전’에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을 출품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를 시작으로 한글서예를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한국에 귀화한 이유가 있나요.



 “귀화 안 하고 사니까 보험이 안 돼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저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어요. 그러려면 제가 한국인이 돼 한국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힘든 점은 없었나요.



 “언어가 힘들었죠. 초반 3개월은 눈물이 났어요. 갓난 아들을 등에 업고 한국 동요를 불러 주며 연습했어요. 시어머니가 그 옆에서 ‘유카야, 다시 해 봐라’ ‘다시 해 봐라’ ‘다시 해 봐라’….”



●최근 독도 문제, 동해 표기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에 긴장이 흐르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나요.



 “일본이 무식하기 때문이에요. 말 그대로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요. 저도 그랬어요. 유학을 간 뒤 과거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고 괴로웠는지 몰라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 많은 한을 어떻게 풀 수 있을지….”



●해결책이 있을까요.



 “일본 정부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감히 한국인이 겪은 아픔을 이해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대신 경청하고 죄송하다고 해야 합니다. 왜곡된 역사를 배운 학생들은 국제사회에서 바보, 꼭두각시가 됩니다. 한·일 역사를 조명하는 포럼, 행사가 많이 열리고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가 한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자고 목소리를 크게 낸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활동이 있나요.



 “한국과 일본의 멋을 비교연구해 보고 싶어요. 그래서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음으로 가까워지고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과 일본의 멋을 각각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의 멋은 깔끔하면서도 한없이 깊은 정(情), 일본의 멋은 쓸쓸하지만 미소가 지어지는 순수함. 동의하시나요?”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선곡유화를 안고 있는 그의 선친.





“지난해에 돌아가신 제 아버지입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제 머리를 감길 정도로 예뻐해 주셨어요. 등교할 때면 ‘유카야, 웃어라. 네가 웃어 줘야 아버지가 하루 종일 힘을 낼 수 있단다’ 하셨죠. 아버지는 배를 탔는데 배 이름도 유카였어요. 13세 때 아버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 적이 있었어요. 깊은 바닷속에 오직 아버지와 제 숨소리만 들렸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요. 아버지는 평생 제 바다였고 이제는 수호신입니다.”



j 칵테일 >> 어머니가 준 6000만원 가치 기모노



후나타니 유카 대표는 인터뷰를 위해 30년 동안 고이 모셔 둔 보물 같은 기모노를 꺼냈다. 10대 소녀일 때 친정어머니가 마련해 준 것이다. 히로시마 고향집에 보관했었는데 지난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이제 정말 네가 가져가라”며 옷을 건넸다. 회색과 감색이 섞인 기모노는 딱 봐도 정숙하고 검소한 느낌이었다. 오색찬란한 천자락이 오로라처럼 펼쳐지길 기대했던 기자는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그런데 기모노 입는 것을 돕기 위해 동행한 마쓰모토 노부코 스타일리스트는 “오랜만에 이렇게 좋은 기모노를 봅니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기모노의 이름은 ‘오시마쓰무기(大島紬)’. 오시마란 섬에서만 나는 천연명주로 만들어졌다. 붓으로 살짝살짝 스친 듯한 무늬가 고유한 특징이다. 값어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30년 전에 100만 엔이 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오르는 옷이라 지금은 최소한 여섯 배 이상”이라고 했다. 한국돈으로 6000만원 이상이란 얘기다. 후나타니 대표는 한국 독자들에게 “기모노를 제대로 입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한국 대중문화 속에 비친 기모노의 이미지가 심하게 왜곡돼 있다는 것. 기모노 입기는 머리 단장부터 시작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다음은 기본적인 순서.



 ▷일본버선(다비)→위아래 속옷(주반)→앞치마(고소데유마키)→가운 형태의 긴 속옷(나가주반)→오비(허리를 감싸는 넓은 띠)→오비를 고정시키는 천(오비아게)→오비 안에 넣는 쿠션(오비마쿠라)→오비를 고정시키는 띠(오비지메)→ 부채(오비 오른쪽에 꼽는다)→신발(조리)



 기모노는 반드시 왼쪽 자락이 오른쪽 자락 위로 오게 입는다. 반대는 죽은 사람이다. 나가주반과 기모노가 뒤로 젖혀져 목덜미가 과도하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서 있을 때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어야 선이 예쁘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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