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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Insight] ‘일점일획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

중앙일보 2011.09.03 01:30 주말섹션 4면 지면보기
“아날로그의 꽃 서예가 디지털의 궁극적인 미래다.”


붓도 힘을 빼야 강한 선이 나온다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64)는 ‘일필휘지(一筆揮之)’ 하지 않는다. 글씨는 ‘나’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점일획(一點一劃)도 허투루 운필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던져 연마하고, 궁구(窮究)할 뿐이다. 붓이라면 대쪽을 갈라 만든 ‘죽필(竹筆)’이자 현대판 ‘남산골 딸깍발이’다. 한국의 대표 서예가로 꼽히는 그가 올 들어 특별한 서예전을 열었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의 한길사에서다. 전시회명은 ‘자중천(字中天)’. 글자 속의 하늘이라는 뜻인데, 어쩌면 도덕경의 ‘천지지시(天地之始)’와 ‘만물지모(萬物之母)’를 가르는 ‘명(名)’마저 ‘자(字)’에 담긴 것 아니냐는 외침이다. 당시 초대형 작품 ‘백수백복(百壽百福)’이 화제를 모았다. ‘수(壽)’와 ‘복(福)’을 각각 백 가지 글씨체로 쓴 것이다. 서체의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특정한 서법(書法)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했다. 복원된 광화문의 현판 글씨를 현존 서예가에게 맡기자는 논의에서도 그는 적임자로 꼽혔다. 요즘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한·중·일 대표 3인 서예전’을 준비하고 있다. 묵향이 진동하는 ‘석곡실(石曲室)’에서 디지털 시대 서예의 길을 물었다.



정리=박종권 기자·jTBC 특임위원  

사진=박종근 기자









박원규 선생이 ‘조화롭다, 화합하다’는 뜻의 갑골문 ‘옹’자를 LED플래시로 썼다. 약 3000년 전 중국 은나라때 글자로 새 두 마리가 부리를 맞대고 정답게 지저귀는 모습에서 취한 것이다. 오늘날엔 ‘邕(옹)’이라고 쓴다.







글씨는 사람이다



 최근 ‘손 글씨’가 사라졌다. 쓰지 않고 터치(Touch) 하거나 타이핑(Typing)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됨됨이를 가늠하던 기준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신언타판(身言打判)’으로 변했다는 자조(自嘲)까지 나온다. 사인은 멋들어진데, 글씨는 왜뚤삐뚤한 것이 디지털 세대의 현주소다.



●서예는 배우기도, 감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입니까.



 “서무정법(書無定法)이라고 합니다. 글씨에 정해진 필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좋은 글씨에는 운치와 격조가 있습니다. 자체(字體)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생기(生氣)’가 있어야 합니다. 글씨가 살아 움직여야 하지요.”



●더 어렵네요. ‘생기’는 무엇입니까.



 “서예는 점과 획으로 이뤄집니다. 선(線)의 예술이죠. 그런데 붓을 꺾고 움직이는 방향·속도와 압력에 따라 획이 달라져요. 획이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천변만화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술성의 원천이자 작품을 보는 안목과도 밀접한 대목이죠.”



●작년 중국에서 황정견(黃庭堅)의 글이 경매에서 거액에 낙찰됐을 때 곧바로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셨죠.



 “중앙일보에 난 글씨를 확대해 모사해 봤죠. 그런데 ‘지(之)’를 비롯해 몇몇 글자의 획이 기존과 확연히 달라요. 그래서 확신했죠.”



 그의 스승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과 대만의 이대목(李大木)이다. ‘석곡실(石曲室)’은 강암의 당호(堂號)인 ‘아석재(我石齋)’와 이대목의 누명(樓名) ‘곡굉(曲肱)’에서 한 자씩 따왔다. 자신의 근본을 밝힌 것이다. 전공은 법학이지만, 대학 시절부터 서법(書法)에 심취했다.



●진시황을 다룬 영화 ‘영웅’에서 서예와 검법이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무예의 달인들이 글씨로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죠. 바로 획을 긋는 운필(運筆)과 찌르고 자르고 베는 운검(雲劍)이 ‘선(線)’에서 만난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붓이나 검이나 똑같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추사 김정희도 붓을 ‘태아검(太阿劍)이 자르고 베는 것같이 쓰라’고 했습니다. 모두 군더더기 없는 선이 요체이지요. 좋은 획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어야 할 곳에 없는 것입니다. 검의 흐름도 마찬가지겠지요.”



●마음먹은 대로 획을 긋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수련이 필요할 테지만.



 “글자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상태와 정진의 단계까지. 획이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쓰기보다 바르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자는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이지만, 글씨는 마음까지 전달하는 것이죠.”



●그래도 ‘잘’ 쓰는 비법이 있다면.



 “개성이 드러나야 좋은 글씨죠. 초심자라면 좋은 글씨를 베끼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고는 정진하는 거죠. 궁극의 단계는 그 글씨를 쓴 서예가의 마음을 훔치는 것입니다. 획은 곧 마음이니까. 더불어 몸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붓도, 검도, 골프도 힘을 빼야 강한 선이 그어집니다.”



●결국 세월인가요.



 “예부터 소년문장은 있어도 소년문필은 없다고 했습니다. 부단히 정진해야 글씨가 경지에 오르니까요. 그래서 ‘인서구로(人書俱老)’라 했습니다. 사람과 글씨가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얘기죠. 농담이지만, 저는 점 하나를 찍어도 40년짜리라고 합니다(웃음).”



●글씨를 보는 안목을 높이기도 쉽지 않겠죠.



 “우선 글자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을 알고, 제대로 운필이 됐는지 가늠할 수 있겠죠.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공부를 해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감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필은 붓을 안 가린다



 그는 벼룻돌 하나를 사려고 집을 팔았다. 좋은 먹과 붓이 있으면 불원천리 찾아간다. 필묵지연(筆墨紙硯), 바로 붓·먹·종이·벼루가 문방사우(文房四友) 아닌가. 묵향이 가득한 서실에서 먹을 머금은 화선지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필통에 붓의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주로 어떤 재료를 쓰나요.



 “대부분 동물의 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붓은 족제비 꼬리털을 쓴 ‘낭모필(狼毛筆)’입니다. 하지만 닭의 깃털, 말총, 쥐의 수염으로도 만듭니다. 식물성도 있는데 갈대로 만든 위필(葦筆), 대나무 죽필(竹筆), 칡을 쓴 갈필(葛筆), 풀을 쓴 모필(茅筆)도 있어요. 좋은 붓은 네 가지 덕(德)을 갖춰야 합니다. 붓끝이 날카롭고, 털이 가지런하며, 모양이 둥글고, 탄력이 좋은 것이죠.”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어떻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오해도 있는 것 같아요. 모필(毛筆)마다 특성이 있거든요. 황모필(黃毛筆)은 획이 부드러우면서 날렵하지요. 죽필(竹筆)은 뻣뻣해 눕히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선비의 기개를 나타내는 글을 쓰기에 제격이지요. 반면 양모(羊毛)는 한번 누우면 일어날 줄 몰라요. 이를 일으켜 운필(運筆)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서예가로서 최고 경지죠. 무심필(無心筆)이라고 합니다. 붓을 안 가린다는 말은 이처럼 모필의 특성을 알아 제대로 쓸 줄 안다는 뜻이겠지요.”



●무슨 모필을 주로 사용하십니까.



 “저는 곰 털을 즐깁니다. 우직하거든요. 강하면서도 탄력이 있고요.”



●서실에 묵향(墨香)이 매우 진하네요. 먹은 특히 극상품에서 싸구려까지 천차만별일 것 같은데요.



 “중국의 송연묵을 최고로 치죠.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사슴의 뼈를 녹여 붓고 사향노루의 향을 섞은 것이죠. 그을음은 풀무를 돌려 가장 멀리 날아간 미세한 가루가 으뜸입니다. 문화혁명 이후 제조기술이 실종됐어요. 지금은 일본의 ‘고바이엔(古梅園)’ 제품을 알아줍니다. 오동나무 기름으로 그을음을 만드는데, 저도 한정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먹을 가는 것도 법도가 있겠죠. 먹빛이 천 년을 간다는 말도 있고요.



 “먹은 병자처럼, 붓은 장사처럼 쥐란 말이 있지요. 먹을 강하게 쥐면 입자가 거칠어져요. 팔에서 힘을 빼고 시계방향으로 둥글게 갑니다.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이기도 하죠. 먹물 빛이 탁하지 않고 윤기가 흐르면 바야흐로 붓을 담글 때입니다.”



●벼루는 어떻습니까. 먹은 속히 닳지만 벼루는 오래가지 않습니까.



 “붓과 먹도 귀하지만 벼루가 으뜸이지요. 조선 후기 유득공이 친구의 벼루를 훔치고는 시를 남겼답니다. ‘미불은 옷 소매에 벼루를 훔쳤고, 소동파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져갔지. 옛사람도 그랬거늘 나야 말해 무엇 하랴’고 말이죠. 선비들은 세수를 걸러도 세연(洗硯)은 꼼꼼히 챙겼다고 하죠. 남은 먹물을 깨끗이 닦아내야 다음 먹이 생기를 띠니까요.”



●명품 벼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1984년인데 인사동에서 좋은 벼룻돌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어요. 일본인과 경합이 붙었고, 고심 끝에 집을 팔아 충당했습니다. 벼루 장인에게 맡겼죠. 월당 홍진표 선생이 먹을 갈아보시고는 ‘오금연(烏金硯)’이라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에 따뜻한 물로 씻다가 그만 금이 갔습니다. 작은 온도 차이에 쪼개진 것이죠.”



●지금 쓰는 벼루는요.



 “충남 보령산의 폐광에서 돌 7t을 구해 한정판 벼루를 만들었죠. 이름은 ‘무문석우(无文石友)’라 붙였는데, 그중 하나입니다.”



●종이는 어떤 것을 쓰십니까.



 “중국의 선지를 씁니다. 수작업으로 만든 종이죠. 10년쯤 묵혔다가 사용합니다. 추사 김정희도 옥판선지를 썼습니다. 화선지는 수명이 40년 정도로 짧고, 전통 한지(韓紙)는 생산량이 적어서요.”





디지털 시대 서예의 길









박원규 선생의 작품 ‘백수백복’.





서예 인구가 언필칭 300만. 크고 작은 서예전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예술과 휘호(揮毫)의 중간쯤이랄까. 그는 각종 서예전의 단골 심사위원장이다.



●지난 6월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입상한 작품이 오·탈자 논란을 빚었습니다.



 “뜻도 모르고 베껴서야 모사(模寫)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글의 뜻을 알아야 감흥이 우러나오고 획도 살지요. 걸맞은 서체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라면 도도한 흥취가 배어야 하겠지요. 이때는 초서체(草書體)가 제격입니다. 이를 정자체(正字體)로 하면 아무리 잘 써도 반쪽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서예 인구가 그만큼 있으니 다행 아닙니까. 중·고교 교과서마저 디지털화되면 쓰기 자체가 박제화될 것이란 우려까지 나옵니다.



 “문자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서예는 존속할 것입니다. 또 디지털의 종착점이 어디겠습니까. 아날로그를 ‘0’과 ‘1’로 잘라서 표현한 것이 디지털인데, 그 미분의 끝은 아날로그죠. 서예는 아날로그의 정수(精粹)가 아니겠습니까. 미구에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융합하는, 서예가 디지털 문자의 궁극적 추구가 되는 시대가 오리라 봅니다.”



●오히려 초등학교에서 한문과 서예에 관심이 높다고 합니다.



 “서예는 문자와 예술이 복합된 종합예술입니다. 실용적으로도, 마음자리를 다스리는 데도 좋죠. 요즘 ‘나는 가수다’가 비디오 시대에 듣는 음악의 본령을 일깨워줬다면, 서예가 타이프 시대에 ‘문자는 쓰는 것이다’로 각광받는 셈인가요.”



●표음문자인 한글 서예는 어떻습니까. 다양한 폰트나 서체, 미술작품의 소재로 쓰이는 것 말고요.



 “한글 작품집을 두 권 냈습니다. 나름대로 단어의 뜻을 살려 형상화를 꾀하기도 했고, 한자의 서법(書法)을 적용하기도 했죠. 의미는 있었지만, 그런 작업은 다른 사람 몫인 것 같아요. 저는 한문에 정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소장한 작품이 얼마나 됩니까.



 “한 점도 없습니다. 작품은 작업할 때까지만 제 것일 뿐 낙관이 끝나면 내 것이 아니죠. 예술은 감동이 목표이고, 작품은 시대의 공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 글자, ‘화(和)’입니다. 나쁜 색깔이 없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가 중요합니다. 부드러움과 강함, 약함과 억셈에 어찌 선악(善惡)이 있겠습니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작품 소재로 즐겨 씁니다.”



 그는 여름과 겨울이면 안거(安居)에 든다. 휴대전화도 끄고 작품활동에 정진한다. 과거의 전통을 되살려 현대적 해석을 붙여 미래에 전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 1984년 ‘계해집’을 필두로 모두 25집을 냈다. 그중 ‘마왕퇴백서노자임본’은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개인전은 입장료를 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에는 ‘작비서상(昨非書庠)’이란 글방에서 제자들과 경전을 읽는다.





j 칵테일 >> 취미가 프로 뺨쳐



그는 취미도 전문가 수준이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고수(鼓手)다. 그래서인지 아들도 록그룹 ‘백두산’의 드러머로 활동했다.



●북은 어느 분을 사사했습니까.



 “무형문화재 홍정택 선생님에게 배웠죠. 박봉술·오정숙 명창의 소리에 맞춰 북을 쳤고요.”



●입상 경력이 화려하던데요.



 “1980년대 중반 전주에서 전국 고수대회가 열렸죠. 박동진 명창의 ‘적벽가’에 맞춰 북을 치는데, 해마다 3명이 남는 결선에 올랐어요.”



●사진도 프로급인데요.



 “소형과 중형 카메라는 라이카·핫셀브라드·롤라이플렉스 등을 주로 씁니다. 대형 카메라는 렌즈가 중요한데 독일 슈나이더사의 수퍼짐마와 수퍼안굴론 렌즈를 애용하죠. 모두 수동입니다.”



●영화 작업에도 참여하셨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전’에서 서예작품을 맡았습니다. ‘천년학’과 ‘취화선’의 제자(題字)를 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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