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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후회하는 유권자

중앙일보 2011.08.31 00:28 종합 38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어쩌면 산다는 것은 곧 후회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간 길’에 대한 후회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다. 사이코패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자책한다는 주장도 있다. 가지가지 후회가 있다. 잘못된 상품을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구매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구매자 후회(buyer’s remorse)’가 있고 문신한 사람들 중 일부는 ‘문신 후회’로 고민한다.



 ‘유권자 후회(voter’s remorse)’는 어떤 후보에 표를 던진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다. 특정 후보가 당선되면 마술처럼 일이 잘 풀리는 태평성대를 기대하다 실망하는 유권자들이 꽤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떤 후회든지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유권자 후회의 가장 큰 원인으로 학계가 지목하는 것은 정치·경제 문제에 대한 지식의 양이 유권자들에게 부족한 것이다. 지식이 부족하면 직관이나 주위 사람들이 형성하는 바람·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미국의 선거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통 유권자는 기묘하거나 엉뚱한 믿음을 갖는 경우도 많다. 유권자가 똑똑하지 않으면 정치인은 이미지·인기 관리에 주로 힘쓰게 된다.



 정당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는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지지 정당을 보고 찍는 것도 유권자 후회의 중대 원인이다. 이런 현상은 정당 정치를 하는 모든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민주주의에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유권자들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집안 내력’에 따라 특정 정당 후보에 투표하는 것은 정당 정치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역기능이다. 정도가 심한 것은 우리나라다. 아직 굳건히 살아 있는 지역 정치 구도 때문에 지역마다 몰표가 나온다. 후회하다가도 막상 투표장에서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자신의 이익으로 봐서는 A당을 찍어야 하는데 B당을 찍거나, 반대로 B당을 찍어야 하는데 A당을 찍고 땅을 치며 후회하더라도 두 가지 경우의 유권자 수가 비슷하면 상쇄돼 정치 공동체 입장에서는 결과가 같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공동체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 차원도 있다. 가능하면 올바른 선택을 해 행복한 유권자가 많은 게 좋지 않을까.



 후회하는 유권자도 문제지만 ‘후회하지 않는 유권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후회하지 않는 유권자’는 보수주의·진보주의 등 이념을 기준으로 투표하는 ‘이념형(理念形) 유권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념형 유권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합리화를 잘한다. 자신의 선택이 항상 옳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후회할 이유가 없다. ‘이념형 유권자’가 유념해야 할 점은 이념과 정책이 밀접하지만 이념이 정책의 품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이념이 항상 좋은 정책을 낳는 것도 항상 나쁜 이념을 낳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가 후회하지 않으면 정치권도 후회하지 않는다. 정책상의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잘했다고 우기면 수긍해 주는 지지층이 확보됐기 때문이다. 25%건 30%건 성과와 상관 없이 우리 편이 돼주는 유권자들이 있으면 정책 개발과 실천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 선거의 승패는 정책이 좌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책적 해이’에 빠지게 된다. 정치는 아무래도 정치·행정을 해본 사람이 잘하지만 그럴듯한 인물을 영입하는 데 힘쓰고, 좋은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거 승리를 위해 합당·연대와 같은 정치 공학에 공을 들이게 된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다. 그러나 산업화·민주화 이후에도 산업의 고도화와 정치 발전은 계속되는 것이다.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경제나 정치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 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유권자 중심으로 보면, 선거 때마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유권자, 지지 정당에 너무 관대해 후회란 없는 유권자의 수는 줄고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투표 행위를 바꾸는 유권자의 수가 늘어나야 한다. 유권자가 똑똑해지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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