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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2) 漢流 스타 황류솽

중앙일보 2011.08.29 09:30


▲황류솽(왼쪽 셋째)은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조국을 방문했다. 1936년 겨울 난징(南京).[김명호 제공]

漢流 스타 황류솽 모국 방문 소식에 온 중국이 들썩



무성영화시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중국인들의 이국적인 생활상을 화면에 담기 좋아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촬영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엑스트라 구하기도 수월했다. 담배 한 갑이면 카메라 앞에서 온갖 능청들을 잘 떨었다.



황류솽(黃柳霜·황유상)은 재미 화교 3세였다. 할아버지는 캘리포니아의 금광에서 죽도록 일하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LA)의 작은 세탁소집 주인이었다.



인근에 사진관이 있었다. 황류솽은 어릴 때부터 사진관 앞에 서서 넋을 잃었다. 온갖 배우들의 사진들이 다 걸려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영화나 사진에서 본 온갖 동작들을 따라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아버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후일 황류솽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부녀가 나눈 대화를 회고록에 남겼다. “영화를 찍으면 영혼을 상실한다. 영혼을 상실한 후라야 배우가 될 수 있다.” 딸이 물었다. “영혼이 뭔데요?”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영혼은 정신이다. 영혼을 상실하면 속이 텅 빈 껍데기일 뿐, 생각도 없고 희로애락도 없다. 명배우가 되려면 그래야 한다. 자신 있니?” 중년의 세탁소 주인은 딸에게서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었다. “귀신이 되려고 기를 쓰면 되겠군요. 못할 것도 없죠.”



1919년, 14살 되던 해 여름, 단역으로 처음 출연했다. 비키니를 입은 노예 역이었다. 반응이 묘했다. 출연 요청이 잇따랐지만 제대로 된 역은 없었다. 창녀 아니면 시궁창 같은 남자에게 홀딱 빠져 이것저것 다 뜯기고 결국은 물에 빠져 죽는 역들만 맡았다.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야한 의상에 넓적다리 노출은 기본이었다. 감독을 찾아가 항의했다. “내 역을 백인에게 맡겨 봐라. 나만 못하면 연락해라.” 황인종이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을 때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중국남자도 좀도둑이나 거지 아니면 사기꾼이었다.



황류솽은 무대극에도 심심치 않게 출연했다. 주어진 역이 영화와 큰 차이가 없었다. 막이 올라가기 전, 요염한 모습으로 관중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어떤 복장을 하고, 세상에 없는 악역을 하더라도 중국인의 모든 면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1935년 린위탕(林語堂·임어당)의 영문 산문집 My Country and My People(吾國吾民)이 출간됐다. 황류솽은 조국땅을 밟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봄, 할리우드 스타 황류솽을 태운 여객선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몰려든 기자와 영화계 종사자, 구경꾼들로 주변이 난리통이었다. 국제무대에서 Wellington Koo(웰링턴 쿠)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과 작가 린위탕의 모습도 보였다.



황류솽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백 대의 카메라가 펑펑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불을 뿜었다. 막 30대에 들어선 중국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는 온갖 포즈를 취하며 매력을 뽐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고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머리카락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난리들을 치는 바람에 팔다리 부러지고, 머리통 터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깔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설중매(雪中梅)를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며 눈 오는 날 산속 헤매다 얼어 죽고, 맹수에게 물려간 시인묵객(詩人墨客)을 수없이 배출한 민족의 후예들다웠다.



이튿날 아침,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은 보던 신문을 집어던졌다. “구웨이쥔, 린위탕 할 것 없이 모두 주책바가지들”이라며 혀를 찼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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