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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91) 가장 특별한 두 개의 상

중앙일보 2011.08.29 00:58 종합 28면 지면보기



‘최악배우상에 뽑혔습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1967년 ‘제1회 서울대학교 영화페스티벌’로부터 받은 최악배우상 상패를 들고 있는 신성일.





지금까지 숱한 상을 받았지만 1967, 68년 잇따라 수상한 두 개의 상이 가장 특별했다.



 67년 5월 무렵 서울문리대학생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6월 7일 ‘최악배우상’을 수여할 테니 시상식에 참여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대학시네마클럽과 서울문리대학생회가 주최한 ‘제1회 서울대학교 영화페스티벌’이었다. 행사를 기획한 주역은 당시 문리대 불문과 학생이던 하길종이다. 그는 70년대 ‘바보들의 행진’ ‘화분’ ‘속 별들의 고향’ 등을 연출했고, ‘영상시대’란 영화그룹을 조직하는 등 새로운 영화운동을 펼쳤다.



 하버드대 유머잡지 ‘하버드 램푼’이 수여하는 최악배우상을 모델로 한 이 시상식은 최악배우상에 나를, 최악감독상에 정진우 감독을 선정했다. 그들이 나를 뽑은 이유는 이랬다.









고 하길종 감독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가장 다작 출연을 한 스타이면서 그는 영화 내에서 그릇된 청춘상을 그림으로써 마땅히 한국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건전한 의지를 빗나간 사랑의 노예나 도덕을 부정하는 데카당한 인간으로 유도해 관객에게 욕구 불만을 대신 풀어주는 스타에 불과했다…. 그는 무한정 스타덤을 차지해 신인발굴에도 큰 차질을 가지게 했으며, 남자배우는 무조건 잘 생겨야 한다는 관념을 불러 일으켜 분노를 사게 했으므로 상을 줄 수밖에 없다.’



 나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대학생들의 의도였다. 나는 동숭동 서울대에서 열린 시상식에 흔쾌히 참석했다. 서울대는 내가 집안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한 선망의 학교였다. 게다가 상이 애교 있었다. 그날 도자기 흙으로 굽고 유약을 바른 도깨비 얼굴을 나무판에 부착한 상패를 받았다. 서울대 조소과 학생들이 제작한 것으로, 정형화된 상패와 확연히 달랐다. 나는 여러 상패 중에서도 그것을 가장 아꼈다. 그 해 시상식이 이 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68년 11월 ‘제7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으로 자존심을 회복했다. 심사위원회는 남녀주연상의 경우 자기 목소리 녹음이 아니면 대종상 후보에 올리지 않았다. 63년 시작해서 73년 없어진 조선일보 청룡상의 경우 내가 매년 애독자 투표에 의해 인기상을 탔다. 나는 너무 출연작이 많았고, 열악한 녹음실에 갈 분위기도 못되었다. 신영균·박노식·최무룡·최은희·황정순·문정숙 등은 자기 목소리를 넣고 대종상을 자주 수상했다. 오기가 생겼다. 영화 ‘이상의 날개’를 촬영할 때 내 친구이자 제작자인 대동흥업의 도동환 사장에게 말했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목소리 넣어야겠어.”



 문희와 남정임도 대종상 수상을 목표로 나와 함께 녹음실에서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넣었다. 예상대로 내게 상이 돌아왔다. 문희도 그 해 대종상에서 ‘카인의 후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71년 전투기 조종사인 셋째 형 강신구 중령이 최신형 전투기인 F5A 한 편대를 미국에서 몰고 귀국했다. 그때 함께 온 미국 조종사 제임스 코너 중령이 이태원 우리집에 머물렀다. 3층에 전시된 내 트로피와 상패를 구경하던 그는 최악배우상 상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갖고 싶다고 하길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30년이 지난 2001년 가을 방한한 코너 중령 부부가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우리는 잘 보관하고 실컷 보았다”며 최악배우상 상패를 돌려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태평양 건너 30년의 소중한 인연이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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