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축지법

중앙일보 2011.08.29 00:28 종합 33면 지면보기








인간에게는 남보다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축지법(縮地法)이다.『신선전(神仙傳)』 ‘호공(壺公)’조에 축지법 이야기가 나온다. 한(漢)나라 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에게 천리의 지맥(地脈)을 축소시키는 축지법을 배워 천리도 한달음에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에서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축지법의 인물로 전해진다. 『월간 야담(野談:1934년)』 창간호의 ‘천하 기인 이토정의 면영(面影)’이란 글을 보니 이지함이 서울에서 360리 떨어진 청양의 친구 이생(李生) 집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지함과 교류했던 율곡 이이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의 글에는 그가 주자학에 구애 받지 않았던 이인(異人)이라는 이야기는 있어도 축지법 이야기는 없다. 조카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쓴 ‘숙부(叔父) 묘갈명(墓碣銘)’에는 “(이지함이) 나라 안의 산천은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괴로움을 참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했다”는 구절이 있다. 각지를 줄기차게 걸어다닌 것이 이지함의 여러 이적(異蹟)과 맞물리면서 축지법을 한다고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후기 문인인 조수삼(趙秀三)의 ‘죽서조생전(鬻書曺生傳)’에는 조선의 책 장수인 조생(曺生)이란 인물이 “달리는 것이 마치 나는 것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19년(1882) 발생한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는 여주를 거쳐 충주 장원재(章院材)에 있는 익찬(翊贊)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도주했다. 이때 보부상 출신의 이용익(李容翊)이 왕비 민씨와 민영익(閔泳翊) 사이 왕복 400리 길을 하루 만에 오가며 연락해 왕비 복위 후 단천부사(端川府使)로 발탁됐다는 일화가 있다. 『고종실록』19년(1882) 10월 2일조는 고종이 “협련군(挾輦軍) 김성택(金聖澤)이 변란이 발생했을 때 앞장서서 충성한 일은 너무도 가상하다”면서 감목관(監牧官)으로 임명하고, 뒤이어 해남(海南)현감으로 승진시켰다고 전한다. 김성택은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의 가마를 메고 도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용익과 김성택의 사례는 달리기 능력은 꾸준한 노력의 소산임을 말해준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모인 전 세계의 준족들도 축지법이라기보다는 꾸준한 연습의 소산일 것이다. 실제 축지법은 상체를 흔들면서 건들건들 걸어 힘 소모를 극소화하는 걸음으로 알려진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