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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바시의 월드 뷰] 일본 새 비전, 인간 안전보장 국가

중앙일보 2011.08.29 00:26 종합 33면 지면보기






후나바시 요이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사고 및 피해라고 하는 이른바 ‘3·11 모멘트’는 일본의 국가 형태를 뿌리부터 뒤바꾸게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부흥과 성장 속에 형성돼 온 ‘평화 국가’의 비전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이번 원전 위기와의 싸움 속에서 다시 한번 부각됐다. 그건 한마디로 ‘안전보장국가’로서의 국가 비전이 결여됐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국가·국민의 안전(안심)에 있어서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피해왔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논하는 것 자체에 대한 기피감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고, “그런 시나리오가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평화국가 일본이 할 역할”이라는 ‘평화론’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냉전 후 이 같은 평화론은 도전을 받아왔다. 1990~91년의 걸프전은 전후 일본의 ‘일국(一國)평화주의’적 안보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95년 고베(神戶) 대지진과 사린 독가스 테러는 위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켰다. 북한에 의한 93년 노동 미사일, 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일본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통감시켰다. 2001년의 9·11테러는 원리주의자에 의한 테러와 대량파괴무기의 결절(結節)이라고 하는 21세기의 전 세계적 실존적 위협을 예감시켰다.



 일본의 안전보장관(觀)은 이들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서서히 진화를 거듭해 왔다. 예를 들면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계기로 일본은 기존의 ‘일·미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을 수정, “일·미 간의 조정 메커니즘을 일상시부터 구축한다”고 양국 간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그런 상황이 일어났을 때의 긴급 대응방안을 논의하거나 그 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을 해오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인이 ‘일본의 브랜드’로 굳게 신봉해 온 ‘안전·안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 거부증이라고 하는 평화론과 융합된 형태로 자연스럽게 여겨져 왔던 것이다.



희한한 일이지만 안전보장을 둘러싼 ‘최악의 시나리오’ 거부증은 원전 사고를 둘러싼 ‘최악의 시나리오’ 거부증과 서로 매우 닮았다.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 그걸 논의하는 것은 상대에게 불필요한 의구심을 주게 된다. 따라서 ‘위험한 냄새가 나는’ 논의는 삼가야 한다.



“원전 사고는 일어나선 안 된다.” 그걸 논의하는 것은 주민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을 주게 된다. 따라서 ‘위험한 냄새가 나는’ 것은 현장에서 멀리 둬야만 한다.



 원전 사고 처리 로봇의 개발 또한 그런 ‘위험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여겨져 중도에 중단됐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배경의 하나는 전력회사나 그걸 규제하는 관청 모두 공유하고 말았던 “원전 사고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거부증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선 평상시에 대비하기 불가능하다. 3·11에 의해 ‘원전 절대 안전 신화’가 붕괴된 것과 더불어 전후 일본 평화론의 ‘안전·안심 신화’ 또한 함께 붕괴하고 만 것이다. 그 신화 붕괴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국가 형태의 모색이 시작되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안에는 ‘최악의 시나리오’ 위기에의 대응, 평상시와 유사시의 모드(mode) 전환, 국가와 국민을 보호함에 있어서의 자조(自助)와 자립의 원칙, 리더십의 사활적 중요성, ‘인간 안전보장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비전 구축 등과 같은 것들이 앞으로의 과제로서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 중 ‘인간 안전보장국가(human security state)’라고 하는 건 전시도 평상시도 아닌 ‘그레이 존(gray zone)’의 치사(致死)성이 극도로 높은 리스크를 억제, 회피, 감소시키는 위기관리체제와 안전보장체제를 국가 차원에서 확립하는 안전보장 정책의 필요성을 뜻한다.



 냉전의 개막과 함께 미국이 소련의 위협에 대해 국가안전보장법에 입각해 ‘국가안전보장국가(national security state)’를 ‘나라 만들기’의 골격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위험 사회 일본의 경우 ‘인간의 안전보장’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 안전보장국가’로서의 국가 비전이 필요할 것이다.



 3·11 모멘트는 국가 위기 시의 일·미 동맹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통감시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니 그 못지않게 그걸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의사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뜨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런 의사와 능력이 있는 나라가 못 되면 상대방 동맹국은 결정적 순간에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결정적 순간의 일·미 간의 조정 메커니즘이 아직도 불충분하며 새로운 ‘조정 메커니즘’의 구축이 시급하다는 점 또한 일본 국민은 학습했다.



 3·11 모멘트를 되돌이켜 보면 일본 자위대가 수소 폭발한 원자로를 냉각시키기 위한 방수(放水)를 포기하고 철수한 3월 16일이 일본인들에게 가장 참담했던 날이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튿날 17일 자위대는 드디어 헬기를 통한 방수를 감행했다. 그날을 경계로 일본인의 마음에는 희망이 생겼다.



 그 17일의 헬기 방수에 대해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훗날 이렇게 주위에 털어놨다고 한다. “우선 일본인이 목숨을 걸고 위기에 맞선 다음, 그리고 나서 미국에 부탁을 하려 했다. 그래서 자위대에 대해 ‘목숨을 걸고 나가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시민운동가에서 정치로 첫걸음을 내디뎠던 이른바 ‘베트남 전쟁세대’인 간 총리가 도달한 이런 인식이야말로 일본의 ‘자립선언’과 일·미 동맹의 새로운 과제, 그리고 일본의 ‘인간 안전보장국가’로서의 새로운 지평을 아마도 간 총리 본인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3·11 모멘트는 길고도 길었던 일본의 전후가 마침내 끝난 것을 고하고 있다.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본사 객원칼럼니스트·일본 게이오 대학 특별초빙교수·전 아사히신문 주필

정리=김현기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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