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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독재 기관차는 스스로 서는 법이 없다

중앙일보 2011.08.27 01:40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권력이란 잘 맞는 날의 골프와 같습니다. 독재권력은 실력 이상으로 잘 맞는 날의 골프고요. 좁은 페어웨이도 운동장만 하게 보입니다. 마음껏 골프채를 휘둘러도 공이 똑바로 멀리 날아갑니다. 자신감은 치솟고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개 다리처럼 휜 홀도, 벙커나 해저드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쯤이야 쉽게 넘길 수 있어 보입니다. 실력 이상이라고 했지요? 열 번 쳐서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샷이 자신의 실력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벙커에 빠지거나 공을 잃어버려도 운이 없었다고 믿게 됩니다. 다음 홀에서 뭔가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결과가 좋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착각은 계속됩니다. 처음에 잘 맞던 기억을 잊고 볼품없는 본 실력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 볼일 다 본 겁니다. 남은 건 이판사판 말고 없지요.



 골프야 그저 져서 속 상하거나 돈 잃어 속 쓰린 걸로 끝납니다. 하지만 권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권력자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거야 뭐랄 것 없겠지만 그 밑에서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해야 하는 백성들은 뭐란 말입니까.



 리비아의 절대권력자 카다피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벼랑 끝에 몰려서도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지요. 과연 누구를 위한 결사항전인가요. 내전의 핏물에 질식해 가고 있는 국민들은 어떻게 하고요. 카다피뿐 아니라 모든 독재자가 대체로 비슷합니다. 70년 전의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졌지요.



 1942년 10월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은 패배의 순간이 다가옴을 직감합니다. 아프리카에 부임하자마자 단숨에 650㎞를 진격해 리비아의 영국군을 이집트로 몰아내고, 세 배나 적은 수의 전차로 전략 요충지인 이집트의 엘알라메인을 점령한 그였지만 절대적 열세인 병력과 병참을 어쩔 수는 없었던 겁니다. 당시 독일군 전차는 22대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마저도 취사장의 에틸알코올을 연료로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지요.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히틀러는 “엘알라메인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요. 롬멜은 명령을 어기고 리비아로 퇴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아프리카에서 철수하자”고 히틀러에게 제안합니다. 히틀러는 롬멜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길길이 날뛰었지요. 결국 두 달 뒤 독일과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군단은 튀니지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여기서 히틀러가 제 실력을 냉정하게 돌아봤다면 운명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재 기관차는 스스로 서는 법이 없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지 열하루가 지난 1944년 6월 17일 독일군 수뇌부가 회동합니다. 승부는 갈렸으며 여기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지요. 롬멜은 이를 히틀러에게 전달할 역할을 떠맡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분노만 돋웠을 뿐이지요. 히틀러는 롬멜에게 반란 누명을 씌워 자살을 강요합니다.



 독재자의 착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됩니다. 히틀러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렇다지요. “아, 내가 너무 인정 많았던 게 후회돼.”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질환자와 불치병자를 없애라는 명령으로 7만 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많았던 인정은 과연 누굴 위해 베풀어졌던 걸까요. 그가 항복을 거부하고 버티는 동안 독일 국민은 폭격기로 뒤덮인 검은 하늘 아래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는데 말이지요.



 카다피나 히틀러나 국민을 생각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독재권력은 사람을 꼬챙이에 꿰는 형벌과 같다. 시작은 쉽게 되지만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했습니다. 너무 섬뜩한 비유라면 잘 맞아서 우쭐했다 망가지는 골프라 해도 좋습니다. 권력자가 국민을 생각한다면 독재로 흐를 까닭이 없고 스스로 파멸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모범을 놀랍게도 경제권력들이 보여줍니다. 스스로 추구하는 시스템이 붕괴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자기분열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랄 수도, 그 해법이랄 수 있겠습니다. 자신 같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하라는 워런 버핏이 그렇고, 이에 호응해 스스로 세금을 더 내겠다고 선언한 프랑스의 부호들이 그렇습니다. 리더십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자기희생에서 비롯됩니다. 그 기분 좋은 자기희생을 예수는 박애라 부르고, 석가는 자비라 일컬으며 공자는 인(仁)이라 말합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j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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