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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자고로 비워야 산다

중앙일보 2011.08.27 00:10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화요일 아침 식탁에 앉았는데 영 입맛이 없었다. 전날 과식한 탓인지 속이 메스껍고 어딘가 체한 느낌이 들어 결국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체한 느낌이 여전해 점심은 죽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속은 더 불편해졌고 급기야 저녁 나절부터 속에 있는 것들을 아래로 쏟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몸 안의 물이란 물은 다 빼내는 것 같았다. 탈수 증세가 올 것 같아 따뜻한 물을 마셨지만 그마저도 그대로 쏟아냈다.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가 있던 수요일 새벽까지 멎을 만하면 반복되는 설사 때문에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병원을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응급실을 찾기엔 좀 뭣한 생각이 들어 애써 불편한 배를 부여잡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그날의 주민투표가 어찌 될까 생각도 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떠올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잠을 자느니 아예 깨어나 『동의보감』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운 『동의보감』 국역본을 목차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내경편(內景篇) 위부(胃腑)에 ‘위가 상하는 근거(胃傷證)’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음식을 자기 양보다 곱절을 먹으면 장과 위가 상한다. 위가 상한 증상은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가슴과 배가 그득하고 아프며, 구역질과 딸꾹질을 하고 속이 메슥거리고 트림과 신물을 올리며 얼굴이 누렇게 뜨고 살이 마르며 노곤하게 늘어져 자꾸 누우려고 하며 자주 설사하는 것이다.” 내 증상과 너무나 유사했다. 그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었다. “그래 과식해서 생긴 문제다. 그러니 굶자. 굶는 게 약이다.” 그 후 사흘가량 속을 아예 비울 작정을 하고 굶다시피 했다. 첫날엔 물만 마셨다. 횟수는 줄었지만 설사는 여전했다. 둘째 날엔 점심에만 죽 한 끼를 먹고 물만 마셨다. 설사도 멎는 듯싶었다. 물론 처음엔 기력이 하나도 없더니 조금씩 기운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새 몸무게는 3㎏이나 줄었다. 셋째 날엔 별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연히 체기도 가라앉고 설사도 멎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굶고 비운 덕분이었다.



 # 언젠가 배우에서 자연치유가로 변신한 문숙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무를 보라. 가지가 하나 뚝 부러져도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힘이 있다. 사람도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치유력이 작용하도록 우리는 비워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동물들도 아플 때 굶으며 속부터 비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울 때 그 밑바닥에서 새싹이 솟아나온다.” 그렇다. 비움이 곧 치유다. 진정한 치유는 가득 차 있는 내 안의 찌꺼기를 비워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비우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자기 안을 가능한 한 빈 그릇 상태로 돌려놓았을 때 내 안의 숨은 치유력도 발휘된다.



 # 오늘날 현대병은 대개 못 먹어서 생기는 것이기보다 너무 잘 먹어서 생긴다. 그러니 비워내야 한다. 체하고 설사하는 것은 너무 많이 들어온 것에 대한 몸의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그렇게라도 비워내야 전체적인 밸런스를 다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서의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세상사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정책문제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과식되면서 체증을 유발하고 급기야 정치적 설사를 한 셈이다. 어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진짜 비우는 일이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철저히 비우는 일이어야 한다. 정치적 설사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그 어떤 정략도 안 통한다. 홀로 칩거해 스스로를 비우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비우면 살고 터럭만큼도 욕심 내 미련 남기면 영영 죽는다. 자고로 너나 할 것 없이 비워야 산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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