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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우리 몰아내 달라” … 망명객 급증에 중국인들 두려움

중앙선데이 2011.08.21 00:44 232호 26면 지면보기
추가가에서 바라본 대고산,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거쳐 결성된 경학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중 하나가 된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⑨ 건국의 뿌리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횡도촌에 모인 망명객들이 국외 독립운동의 또 다른 기지로서 주목한 곳이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였다. 현재는 삼원포(三源浦)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3~4㎞ 떨어진 곳이 추가가(鄒家街)였다. 추씨 성의 중국인들이 대대로 집단 거주하는 마을로 추지가(鄒之街)라고도 불린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서 이석영·회영 일가, 그리고 다섯째 이시영이 “장구(長久)히 유지도 하고 우리 목적지를 정하여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양성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면서 1911년 정월 28일에 횡도촌에서 유하현 추가가로 가서 3간 방을 얻어 두 집안이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곳이 이회영·이동녕 등이 남만주 사전 답사 때 무관학교 설립지로 점 찍은 곳이었다. 추가가는 마을 앞으로는 너른 농지가 펼쳐져 있고, 마을 뒤로는 600여m 높이의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小孤山)이 있으며, 그 뒤로 산들이 연달아 있어 유사시 대피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추가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먼저 정착을 하려면 토지를 구입해야 했는데 현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망명객들의 집단 이주 규모가 현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은숙은 추가가의 어른인 순경 노야가 유하현에 이렇게 고발했다고 전한다.

“전에는 조선인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산전박토(山田薄土)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하려고 왔는데, 이번에 온 조선인은 살림차가 수십 대씩이고, 짐차로는 군기(軍器)를 얼마씩 실어오니,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려고 온 것이 분명하다. 빨리 꺼우리(高麗·조선인을 지칭)를 몰아내 달라.”

추씨들은 또 종회(宗會)를 열어 “한국인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절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역시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도 금지한다”고 결의했다. 이 때문인지 중국 군경 수백여 명이 한인들의 숙소를 급습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회영이 필담(筆談)으로 일제의 첩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러 ‘형제지국’에 왔다고 전하자 그냥 돌아갔으나 그 후에도 가옥과 전답은 팔지 않았다. 권상규(權相圭)가 쓴 석주 이상룡의 행장(行狀:1943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한다.

“이때 한인(韓人)의 이사하는 수레가 길에서 이어지니 토착인들이 크게 놀라서 서로 와전된 소문을 퍼뜨렸으니, 심지어 대한(大韓) 황자(皇子)가 경내로 들어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에 청(淸)나라 관리가 각 지역에 엄한 경계를 내렸고, 군대를 보내서 수비하게 했으며, 또 가옥 빌려주는 것을 금하여 사람들 대부분이 노숙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린 한인 망명객들은 ‘변장(變裝)운동’을 전개했다. 이상룡의 행장에 “동지들과 머리를 깎고 옷을 바꾸어서 토착인들과 함께 섞였으며, 상룡(相龍)이라고 개명했다”고 전하는 대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 국적도 취득하자는 운동이었다. 본명 이상희(李象羲)를 이상룡으로 개명한 것도 변장운동의 일환이었다. 다른 이가 서신을 보내 머리를 깎고 중국 옷을 입은 것을 비난하자 이상룡은 “머리카락은 작은 몸[小體]이고 옷은 바깥을 꾸미는 것[外章]인데, 일의 형편상 혹 바꿀 수도 있는 일입니다.… 큰 일을 하려는 자가 어찌 자잘한 것에 얽매여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면 중국인들과 충돌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십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한 것이었다.

한인들은 유하현에 입적(入籍)과 토지매매를 요청하는 한편 이회영과 이상룡의 아우 이봉희(李鳳羲)를 대표로 동삼성(東三省) 총독에게 보내 입적과 토지 매매 허용을 요구했다. 동삼성 총독에게 낸 청원서에 “우리들은 나라를 떠나 이주해온 후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한 무리들입니다. 대개 저 원수놈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회영과 이봉희는 동삼성 총독 조이풍[趙爾豊:조이손(趙爾巽)]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면담에 실패했다.

그러자 이회영은 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해결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원세개는 1882년의 임오군란 때 북양(北洋)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청군(淸軍)의 일원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었다. 청국 대표로 부임했던 27세 때는 가마를 탄 채 입궐하고, 국왕 알현 때도 기립하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체류 때 원세개는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더구나 원세개는 일제에 빼앗긴 한국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회영은 원세개를 만날 수 있었다. 이회영의 설명을 들은 원세개는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대동시켜 동삼성 총독을 방문하게 했다. 원세개 총리의 친서를 받은 동삼성 총독은 자신의 비서 조세웅(趙世雄)을 이회영에게 딸려 보냈고, 회인(懷仁)·통화(通化)·유하(柳河) 세 현장에게 이주 한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회인·통화·유하현의 세 현장은 다음과 같은 동삼성 총독의 훈시를 게시하였다.

“만주 원주민들은 이주하여 오는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농업·교육 등 한국인들의 사업 일체에 협력할 것이다. 서로 간에 분쟁을 야기하거나 불화를 조성하는 일체의 언동을 절대 삼가라. 만일 지시를 위반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런 훈시문이 게재되자 이은숙의 회고대로 3성의 현수(縣守)들의 눈이 휘둥그레져 이후로는 한국인을 두려워해 잘 바라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현지인들과의 갈등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는 “봉천성 삼원보에 자치국(自治國)”이란 기사에서 ‘이천 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또한 삼원보는 1919년 3월 12일 만주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데, 모두 이때 뿌린 씨앗들이 개명한 것이었다. 이주 한인들은 입적과 토지 취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 1911년 4월께 대고산에서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는데, 아들 이준형(李濬衡)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선부군 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처음 추가가에 경학사를 조직했는데, 공의(公議)로 부군(府君:이상룡)을 사장(社長)으로 선출했다. 적의 앞잡이가 염탐할까 염려하여 대고산(大孤山) 속에 들어가 노천(露天)에서 회의를 열었다. 부군이 경학사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였는데, 말과 기색이 강개하여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제가 이른바 105인 사건 판결문에서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집하여 동지(同地:서간도)로 보내어 민단(民團)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라고 바라본 대로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민단을 조직한 것이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개농주의(皆農主義)’와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표방했다. 이상룡은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로 시작하는 경학사 취지서를 통해 경학사가 나아가야 할 바를 밝혔다.

부여의 옛 땅은 눈강(嫩江: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이 아닌가. 더구나 16세기 화란(네덜란드)은 서반아(스페인)로부터 독립하여 부흥했으니 옛날에도 사례가 있는 것이다.

만주를 선조들의 옛 강역으로 보는 역사인식 속에서, 네덜란드처럼 독립할 것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천 군중대회의 결과로 경학사를 건설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대고산에 모인 망명객들의 출신을 따지면 왕정 복고를 추진하는 복벽주의(復<8F9F>主義)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은 왕정을 배격하고 민의에 의한 민단 건설이란 민주공화제의 씨앗을 뿌렸다.

채근식이 무장독립운동비사에서 경학사에 대해 “동삼성(東三省) 한국 혁명 단체의 효시”라고 높이 평가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훗날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가 되는 김학규도 “동삼성 한국 혁명 결사의 개시이자 동북 한국 혁명운동의 선성(先聲)이자 효시(嚆矢)”라고 높이 평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망국 이듬해 망명객들이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조직한 경학사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체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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