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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공산당 안 된다” … 저우, 소년공산단 명칭 주장

중앙선데이 2011.08.21 00:35 232호 29면 지면보기
자오스옌과 저우언라이가 세 들어 살던 고드프루아 호텔은 소년공산당 창당의 발상지였다. 두 사람이 묵었던 방 창문 앞에서 연설하는 중공 주석 겸 국무원 총리 화궈펑(華國鋒·화국봉).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  [김명호 제공]
1922년 6월 18일 일요일 오전, 파리 교외의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프랑스, 독일, 벨기에에 흩어져 있던 근공검학생 대표 18명이 집결했다. 중공 초대 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의 아들 천옌넨(陳延年·진연년)과 왕뤄페이(王若飛·왕약비),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 런줘쉬안(任卓宣·임탁선) 등 국·공 양당의 당사(黨史)에 큰 획을 긋게 될 청년들이었다. 덩시셴(鄧希賢·등희현, 후일의 덩샤오핑)은 나이가 어려서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1>

이날의 주역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이탈리아 광장 부근 한적한 골목에 있는 싸구려 호텔 고드프루아(Godefroy)를 나섰다. 차이허썬이 중국으로 송환된 이후 두 사람은 이곳에서 창당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숲 속 작은 공터에 철 의자를 한 개씩 집어 들고 빙 둘러 앉았다. 목적은 ‘소년공산당’ 창당이었다. 오전 회의는 자오스옌이, 오후는 런줘쉬안이 주재했다.

1975년 5월, 반세기 만에 프랑스를 다시 찾은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근공검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출장비에서 크루아상 한상자를 샀다가 곤욕을 치렀다.
명칭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다들 ‘소년공산당’이 좋다고 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1년 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 1차 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한나라에 2개의 공산당이 있을 수 없다”며 ‘소년공산단’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누군가가 앞에 소년 자가 붙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지르자 다들 동조했다. ‘청년공산당’으로 하자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은 원래부터 소년과 청년의 구분이 불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한 사람씩 입당선서를 하자는 제안도 했다.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선서는 종교의식이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어디다 대고 선서를 하란 말이냐!” “너나 애인 속치마 앞에서 하라”며 낄낄대는가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축들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의 역사를 예로 들었다. “다들 잘 모르겠지만 민국 원년,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임시대총통 직을 넘길 때 민국에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요구했다. 위안은 쑨원의 말을 따랐다. 그 후 위안이 황제가 되자 쑨원은 선서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군대를 일으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별소리가 다 튀어나왔다. “아는 것도 많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점잖은 편이었다. 표결에 부쳤지만 부결됐다. 오후 늦게 뚱뚱한 프랑스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나타나 의자 사용료를 받아갔다.

20세기 초, 청(淸) 말 명문의 후예 리스청(李石曾·이석증)이 파리 교외에 두부공장을 열면서 시작된 근공검학운동은 후일 중국의 정치, 혁명, 학술 방면에 많은 인재들을 양산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사회불평등의 근원을 탐색하고, 잉여가치 학설과 계급투쟁론을 받아들인 학생들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에서 중공의 초기 조직을 만들어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가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배출했다. 정말 엉뚱한 결과였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다 음악으로 방향을 바꾼, 왕광치(王光祈·왕광기)라는 근공검학생이 있었다. 1929년 말, 해외 유학의 양대 조류를 분석한 글을 남겼다. 결론 부분이 흥미롭다. “음악을 시작한 다음부터 모든 게 잘 보였다. 프랑스 유학생들의 행동과 의식구조를 보면 장차 중국 노동계급의 중심인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유학생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 두 패거리 간의 싸움으로 중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것이 확실하다. 누구의 천하가 될지 모르지만 최종 결과는 그게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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