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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한 컷 사진이 정치 운명 가른다

중앙선데이 2011.08.14 04:16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사진의 정치학









1995년 7월 7일 방한 중인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 계단 앞에서 김영삼(YS)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두 정상의 악수 포즈가 미진하자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한번 더 해주십시오”라는 요청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만델라는 “지구상에서 대통령에게 명령하는 사람은 사진기자뿐”이라고 말했다. YS는 “사진기자가 독재자”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두 정상은 다시 웃는 얼굴로 악수했다.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두 대통령도 사진 앞에서는 약했다. 99년 5월 28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국빈만찬이 열렸다. 이때 건배사에 나선 옐친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경호원의 부축을 받았다. 이 장면이 촬영돼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건강이상설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측이 당시 박준영 공보수석에게 강력히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의 근대 사진작가인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사진 속엔 현실이 있고, 때때로 진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사진의 힘은 대중의 감성을 즉각 자극하는 데 있다. 김녕만 월간 사진예술 대표는 “글은 이성을 요구하지만 사진은 말이 필요 없다. 한 컷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사진은 보는 순간 느끼게 만드는 시각 언어”라고 말했다. 사진의 힘을 본능적으로 체감하는 게 정치권이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숙명으로 하는 정치인에게 사진은 놓칠 수 없는 소통 수단이다. 때로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위해, 때로는 치밀한 선거전략 아래 사진 한 컷을 찍는다.











#장면1. 2008년 1월 17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특사로 방중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만났다. 이에 앞서 이날 새벽 특사단 관계자가 취재차 함께 방중한 사진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전 대표가 입을 블라우스 색깔로 하얀색과 노란색 중 어느 쪽이 적절할까”를 묻기 위해서였다. 사진기자는 단아함이 묻어나는 하얀색을 추천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는 막상 노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등장했다. 이 기자는 “사진을 촬영해 보니 오히려 노란색이 깔끔하면서도 기품 있는 느낌으로 나와 놀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상찬 한나라당 의원은 “당시 박 전 대표가 직접 옷을 선택했다”며 “중국에서 노란색은 황제의 색이자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설명했다.



#장면2. 경기도 성남 분당을 보궐선거를 열흘 앞둔 지난 4월 17일. 분당을 선거를 총지휘하던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선거 운동원들에게 ‘검은 양복 착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이제부터 복장은 흰색 티셔츠, 청바지로 통일한다”고 지시했다. 이 최고위원이 훗날 설명한 내용이다. “시꺼먼 양복을 입은 장정이 10여 명씩 아파트 단지를 도는 사진이 인터넷에 뜨는데 마치 조폭처럼 보였다. 대낮 아파트단지에서 부녀자와 노인분들 사이로 검은 양복들이 휘젓고 다니는 장면은 위화감만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장면3.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7월 6일 남아공 더반의 국제컨벤션센터. 유치위원회 실무진은 이명박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조양호 유치위원장,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김진선 특임대사 등이 함께 자리하는 배치도를 올렸다. 그러나 이런 자리 배치는 최종 단계에서 김연아 선수, 나승연 유치위 대변인, 토비 도슨 선수 등도 이 대통령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유치위 핵심 관계자는 “수년간 지구촌을 돌며 유치 활동에 나섰던 분들을 예우하는 초안이 맞겠지만, 올림픽 정신은 패기와 도전인 만큼 전 세계에 타전되는 사진에 ‘젊은 한국’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간의 화제를 모으는 사진들은 치밀한 준비보다는 생각지 못한 ‘의외성’으로 더 평가받는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는 대중에게 ‘꼿꼿 장수’로 각인됐다(사진 5). 2004년 12월 이라크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한 해병대원이 갑자기 껴안았다(사진 4).



이 ‘돌발 사진’은 보수층의 공세에 시달리던 노무현 정부에 단비와 같은 효과를 안겨줬다. 반면 올 3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은 불교계의 반발을 초래했다(사진 3). 곧장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 공세로 번졌다. 2006년 5월 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 도중 면도칼 피습을 당한 박 전 대표의 현장 사진은 ‘정치인 테러’라는 충격적 사태를 단 한 컷으로 보여줬다. 얼굴을 감싸고 현장을 대피하는 박 전 대표의 모습에 보수층은 결집했다. 이는 병상에 있던 박 전 대표의 “대전은요?”라고 한 발언과 결합돼 대전시장 선거의 대역전을 낳는 힘이 됐다.



사진 전문가들은 ‘의외성’을 감안하면 ‘계산된 한 컷’보다 대중의 선입관을 뛰어넘는 인간미 넘치는 사진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며 ‘반전과 공감의 심리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중을 매혹하다』의 저자 강미은(정보방송학과) 숙명여대 교수는 “터프한 남성이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식의 의외성에서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매력을 느낀다”며 “사진 역시 예상과 다른 의외성을 보여줄 때 동일한 효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최근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 담았던 공수부대 복무 시절의 낡은 사진 한 장은 인터넷을 달궜다. ‘샌님 이미지’가 강했던 문 이사장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문 이사장은 “다들 군대에 갔다 왔는데 내 사진만 주목받으니 민망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 사진은 출판사 직원이 문 이사장 집에 와서 골라갔다고 한다.



박 전 대표가 2009년 2월 미니홈피에 올린 스케이트를 신은 사진은 ‘소녀 박근혜’ ‘김연아 박근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네티즌은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로 퍼날랐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2006년 7월 민심대장정 때 새까만 얼굴의 ‘탄광 손학규’ 사진으로 주목받았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을 것 같은 박 전 대표의 앳된 여중생 사진에 젊은 네티즌들은 심리적 반전을 느끼고, 중·노년 보수층들은 산업화 시대의 향수를 되새겼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 실세였던 문 이사장의 공수부대 사진은 기존 정치권에 식상한 중·장년 남성들에게 ‘군대 가서 우리 못지않게 고생했다’는 공감대를 낳았다”(컨설턴트 업체 ‘피크15’ 유민영 대표)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부소장 출신의 이철희 민주당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손학규 대표의 숯검댕이 사진의 경우 경기고ㆍ서울대ㆍ옥스퍼드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에게선 예상할 수 없던 모습”이라며 “냄새 나는 재활용품을 분류하고 벼를 베던 손 대표의 100일 민심대장정 스토리를 이 사진 한 장으로 다 보여줬다”고 말했다.



사진을 통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국무총리 청문회를 앞두고 손을 번쩍 치켜들며 영국의 40대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을 연상케 하는 사진으로 구설에 올랐던 김태호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김해을 보선에선 90도로 인사하는 사진을 내놓았다. 김해 거리에서 홀로 비맞으며 고개 숙인 장면이었다. ‘이색적 장면’으로 유권자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2009년 1월부터 택시기사로 나서 민심 탐방을 하며 ‘핸들 잡은 김문수’ 사진으로 관심을 모았다(사진 1). 운행거리가 벌써 3000㎞를 돌파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과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지낸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는 ‘축구 인연’을 보여주는 사진을 통해 ‘축구 민심’에 호소한다. 지난해 12월엔 그가 자선 축구경기에 직접 출전해 필드를 누비는 사진도 등장했다(사진 2).



사진의 파급력은 사이버 세계의 움직임에도 크게 좌우된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반응하며 인터넷과 트위터ㆍ페이스북 등으로 사진 퍼나르기에 나서면 그 효과는 배가된다. 유민영 대표는 “사진을 퍼나르고 댓글을 달면서 유권자들은 사진 감상자를 벗어나 뉴스 참여자로 나선다”며 “자신이 직접 개입한 만큼 사진에 대해 더 강렬하게 반응하고 공감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돼 유권자들은 직접 사진을 찍어 온라인 세상에 올리는 사진 생산자로 활약한다. 그런 만큼 직접 개입 효과는 더 커지는 것이다.



사진의 힘은 ‘이미지 정치’의 위험성도 안고 있는 양날의 칼이다. 미국의 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택은 전쟁의 참상 사진에 탐닉하는 인간 내면을 지적하며 “의도했건 안 했건 우리는 관음증 환자”라는 글을 남겼다. 이는 ‘자극적인 것을 보는 시각적 즐거움’이 ‘읽고 따지는 논리적 수고’를 넘어선다는 심리적 기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콘텐트보다 감성적 자극에 주력하는 선거전략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다. 이미지 정치도 정치의 한 영역이다. 하지만 콘텐트가 부족한 이미지는 ‘우민정치’ ‘냄비식 정치’를 초래할 수 있다. 유권자나 정치권이나 모두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채병건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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