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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비겁함

중앙선데이 2011.08.14 03:13 231호 2면 지면보기
요즘 좌파진영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빈말이 아니다.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벌어진 해고노동자 김진숙씨의 시위와 김씨를 지원하려 내려간 ‘희망버스’가 단적인 예다. 김씨의 시위는 노조가 회사 측과 협상을 타결해 모양새가 구긴 상태였다. 하지만 좌파진영은 총단결해 불씨를 살려냈다. 연예인들이 찾아가고, 트위터 현장 중계가 이뤄지고, 정치권이 뛰어들고, 인터넷 매체들이 총동원돼 다양한 결합과 진화 과정을 거쳐 ‘광야의 들불’로 키워낸 것이다. 6월 11일 1차 방문 때 이른바 ‘희망’ 버스 승객은 몇 백 명이었다. 7월 9일 2차 때는 1만 명, 7월 30일 3차에는 1만5000명(주최 측 주장)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무엇보다 대학가에서 ‘김진숙과 85호 크레인’을 모르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운동을 감성적 차원까지 고양시킨 것이다. 내년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의 예행연습을 보는 듯하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물론 좌파진영의 내부비판도 있었다.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은 줄기차게 “희망버스는 진보의 재앙”이라고 주장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구호를 앞세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좌파진영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변호사의 급속한 부상은 또 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는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을 펴낸 뒤 불과 한 달 사이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지지도를 넘어섰다. 유례 없는 일이다. 책이 단숨에 100만 권 이상 팔렸어도 얻기 힘든 성과다. 또 다른 차원에서 좌파진영의 역량을 증명한 셈이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우파 공화국’이었고 좌파는 그저 대항집단 정도의 의미였다. 이젠 분명히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좌파든 우파든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집권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요즘 하는 걸 보면 좌파의 앞날은 꽤 밝아 보인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우파는 갈수록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나라당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명색이 보수 집권당이고, 지난 대선에서 사상 최대 격차인 500만 표 차이로 이겼는데 하는 짓을 보면 이 당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다.

한나라당 입장에선 좌파 성향 교육감들이 주창한 ‘즉각적인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게 정상이다. 동시에 자기당 소속인 서울시장이 거기에 맞서 싸우면 총력을 다해 돕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광화문 네거리 주변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들은 예외 없이 주민투표를 비난하는 것뿐이다. ‘나쁜 시장’ 아웃시키고, ‘나쁜 투표’ 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이걸 반박하는 한나라당 플래카드는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친이명박이니, 친박근혜니 하면서 서로 싸울 땐 철천지 원수처럼, 상대방에 대한 온갖 비난을 마다하지 않던 게 이 당 국회의원들이었다. 좀 어이가 없어진다.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지원이 미적지근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 쪽에선 오 시장이 만에 하나 주민투표에서 이기면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할 게 싫었을 것이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에겐 “당신 잘되는 꼴 보기 싫다”는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 시장이 패배하면 좌파진영은 대대적인 사퇴공세를 펼 게 뻔하다. 투표율이 34%가 안 돼 투표함을 개봉조차 못했다면 오 시장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한데 지금 분위기라면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서울시장이 바뀌면 내년 총선과 대선도 엄청난 영향을 받을 것이다.

개구리를 편안하게 죽이는 방법이 있다. 찬물에 집어넣고 천천히 데우면 된다. 개구리는 제 몸 익는 줄도 모른 채 어느 순간 죽는다는 것이다. 요즘 한나라당을 보면 슬슬 더워지는 물속의 개구리가 생각난다.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내 솔직한 관전평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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