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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영국 폭동, 남의 나라 일 아니다

중앙선데이 2011.08.14 03:12 231호 2면 지면보기
다지선다형 문제를 풀려면 ‘(1) 가, (2) 나, (3) 다’와 같이 예시된 답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한데 영미권의 다지선다형 시험 중에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답이 예시되는 경우가 있다. ‘None of the above(가·나·다 중에 답이 없다)’와 ‘All of the above(모두가 답)’이다. 영국 정부가 지금 이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있다. 6일 시작돼 전국으로 번진 폭동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답이 안 보인다.

젊은이들의 좌절감·소외·허무주의·기회주의·물질만능주의와 자긍심·정체성 부재와 같이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원인들이 제시됐다. 양극화에 따른 계급 갈등의 심화, 청년실업, 인종갈등, 가정의 붕괴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헷갈린다. 실업이나 ‘희망 없는 세대의 분노’가 원인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미래가 밝은 10대 육상 유망주, 대학 축구 선수, 발레 전공 학생 등 멀쩡한 청년이 적잖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 백만장자의 딸도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니 양극화의 부작용으로만 몰고 가기도 어렵다.

정치권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보수당은 폭동의 책임이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이끈 노동당의 13년 장기집권에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의 잘못된 교육 정책으로 청년들이 이 모양이 됐고 국가의 지나친 개입이 무책임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동당은 15개월 전 집권한 보수당의 복지 예산 삭감이 도화선이 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처 때 시작됐던 30여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정책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경찰의 미숙한 초기 대응과 1만5000명이 가입해 있는 205개 갱조직에도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경찰을 늘리고 갱조직을 소탕한다고 영국이 앓고 있는 중병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보도에 따르면 약탈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정치인들이야말로 원조 도둑놈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사의 나라’라던 영국이 내부에서 곪아도 단단히 곪고 있었다는 증거다.

문제는 이걸 영국의 일로만 도외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양극화·청년실업·물질만능주의·다문화 갈등 등은 한국에서 더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정치권의 무책임은 영국보다 훨씬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시위가 무차별 약탈로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영국의 사례는 타산지석이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혹시 우리 외양간은 튼튼한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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