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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많이 만난 게 재산, 일제 때 났으면 독립군 됐겠죠”

중앙선데이 2011.08.14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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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5> 막걸리 공장장 된 ‘붉은 악마’ 살림꾼 김정연씨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김정연씨가 천안의 입장주조 공장에서 입장탁주 제조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천안=조용철 기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모임인 ‘붉은 악마’는 한때 회원이 3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위용을 자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경기장을 붉게 물들였고, 길거리 응원을 주도했다. 2002 월드컵 4강의 견인차 역할을 한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의 청년 문화를 바꿔놓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대기업과 손잡고 축구를 상업화시켰다’ ‘특권의식에 젖어 있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국가대표팀 경기가 열리면 수천 명의 붉은 악마가 모인다. 그래서 붉은 악마가 대단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2002 월드컵 이후 사무국을 자진 해체하고 사무실을 없앴다. 지금은 16개 시·도 지부장들이 모여 의장을 뽑고, 실권이 없는 의장 밑에 행정간사와 재정간사가 실무를 처리하는 정도다.



붉은 악마에서 ‘여왕벌’로 불린 사람이 있었다. 2003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8년 동안 행정간사를 맡았던 김정연(37)씨다. 그는 지금 충남 천안에서 부친을 도와 막걸리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붉은 악마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조직적인 응원문화 운동을 시작한 게 2001년 여름이었다. 10년 세월 동안 붉은 악마는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붉은 악마의 정체성과 이들을 둘러싼 온갖 목소리의 실체는 무엇일까,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축구를 다시 세울 길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안고 스포츠 오디세이가 천안으로 내려갔다.



“축구 볼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죠”

경부고속도로 남안성IC를 빠져나와 국도와 산길을 달렸다. ‘천안연미주’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높고 당찬 목소리가 반겼다. 천안시 입장면에 있는 ㈜입장주조는 김씨의 부친이 40년 동안 일궈온 양조장이다. 부모님과 남동생 등 온 가족이 매달려 일하는 이곳에서 김씨의 직함은 ‘전무’다. 하지만 유통과 판매 등 실무의 대부분은 김씨 몫이니 사실상 대표인 셈이다. 지하 200m에서 뽑아 올린 청정수로 만든 입장탁주는 지난해 우리술 품평회에서 우수상을 탔다. 생쌀을 발효해 만든 13도짜리 천안연미주는 독특한 풍미가 있다. 두 제품 모두 천안과 인근 지역에만 공급하지만 매번 물량이 달릴 정도로 인기다. 천안시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공장도 증설했다.











그는 붉은 악마 행정간사 경험이 공장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행정간사를 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어요.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노하우를 갖게 됐죠.”

행정간사는 돈 관리 빼고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자리였다. 회의 준비, 공문 발송, 각종 섭외와 미디어 대응은 기본이었고 경기 때는 응원 도구와 현장 준비까지 그의 몫이었다. 하루에 휴대전화 배터리 4개를 갈 때도 있었다. “워낙 일을 즐겁게 하는 스타일이라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었어요. 다만 축구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게 가장 힘들었죠”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초창기 붉은 악마는 오로지 대표팀 응원과 한국축구 발전을 위한 순수한 모임이었고, 지금도 그 뜻은 변함이 없다고 김씨는 말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휴지폭탄(두루마리를 던지면 휴지가 풀리는 응원도구)을 만들기 위해 회원들이 며칠 밤을 새웠다고 한다. 휴지를 빨리 말기 위해 자비로 공업용 드릴을 구입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98 프랑스 월드컵 때 응원을 끝내고 회원들이 휴지를 주우니까 프랑스 청소원들이 막 화를 냈다고 해요. 자기들 할 일 뺏어 간다고요. 그렇게 ‘우리 뒷정리는 우리가 확실히 하자’는 전통이 자리잡았고,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 때 청소하는 장면이 외신을 타면서 전 세계의 칭찬을 받은 거죠”라고 김씨는 말했다. 그는 바람직한 광장 문화 형성에 붉은 악마가 기여했다는 게 큰 자랑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붉은 악마를 따라다니는 상업성 논쟁은 어떻게 된 걸까. 붉은 악마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붉은 악마 내부에서도 ‘순혈주의’와 ‘공리주의’가 나눠져 치열한 ‘노선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2002 월드컵 1년 전부터 빨간 옷 입기 운동을 펼쳤어요. 그래서 월드컵 때 경기장과 길거리 응원 장소를 빨갛게 물들일 수 있었죠. 그런데 2002년의 성공을 본 몇몇 기업이 상업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붉은 악마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일체의 후원을 받지 말자’는 주장과 ‘우리가 끌고 가지 않으면 더 추한 진흙탕이 된다. 당당하게 받고 투명하게 집행하자’는 쪽이 맞섰죠.”



결국 대한축구협회를 후원하는 기업에 한해 붉은 악마와 협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씨는 “붉은 악마는 해외 원정 때 돈을 받는다, 경기장은 공짜로 들어간다는 등 별별 악소문이 많았지만 내가 욕을 먹더라도 축구판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견뎌냈죠”라고 말했다.



“우린 밝고 건강한 국가주의”

태극기와 애국가가 어우러지는 붉은 악마의 응원을 ‘국가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씨가 말했다. “국가주의 분위기가 강한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외치고 나면 애국심이 자동으로 생겨요. 저도 이 나라가 싫어 이민 가고 싶어했던 사람이거든요. 해외 원정 때 살벌한 분위기에서 응원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 ‘당신들은 일제시대 태어났으면 독립군 했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지난주 한국 대표팀은 삿포로에서 일본에 0-3으로 참패했다. 한국에서 50명, 일본에서 16명의 붉은 악마가 뭉쳐 교민 500여 명과 응원전을 펼쳤지만 일본 관중의 위세에 막혔다. 승부조작 후폭풍으로 프로축구는 야구의 위세에 눌리고 있다. 한국축구의 총체적 위기를 보는 김씨의 마음은 답답하다.

“팬, 선수, 붉은 악마 모두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욕심 부리지도, 잘난 척하지도 말고요. 정말 축구가 좋아 응원하고 경기에서 모든 걸 쏟아붓던 순수한 마음이 됐으면 합니다. 한국축구, 아직 희망이 있어요.”



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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