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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문학과 인연, 방송작가로 불후의 명성

중앙선데이 2011.08.14 01:41 231호 9면 지면보기
장편소설 ‘이 생명 다하도록’을 집필할 때의 작가 한운사. [중앙포토]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문단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한운사 같은 문인은 다소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문예지의 추천이라든가 일간지의 신춘문예 혹은 현상공모제도를 거치는 것이 문단 진출의 필수적인 코스라면, 한운사는 그 어떤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문학의 여러 장르를 두루 넘나들며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3> 다양한 장르 넘나든 한운사

그는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라디오·TV드라마나 시나리오와 희곡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시에서 전기(傳記)·회고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많은 글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는 ‘방송작가’라는 타이틀만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그로서는 그것이 다소 못마땅했던 듯싶다. 그냥 ‘작가’라 하면 어때서 꼭 ‘방송작가’라 소개하느냐는 불평을 내게 토로했던 적도 몇 번 있다.

그럴 만한 까닭은 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방송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처음 쓴 글도 소설이었고, 그때까지 쓴 글도 주로 ‘입체낭독’용의 소설 형식이었던 것이다. 192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한운사는 청주상고를 거쳐 일본 중앙대 예과에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는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다.

48년 재학 중 아르바이트를 위해 중앙방송국을 찾아간 것이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계기였다. 채용 여부를 결정짓는 테스트가 소설 한 편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동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워가며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일제치하에서 교육을 받아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그가 처음 한글로 쓴 단편소설이 ‘날아간 새’였고, 김억이 심사한 그 작품으로 그는 방송국에 일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6·25전쟁 중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가 9·28수복 후 미군에게 포로가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 그는 54년 6월 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문화부 기자로 발탁된다. 그의 기자 생활은 이듬해인 55년 11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홍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1년5개월의 단명에 그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뜻 깊은 기사들로 문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애국가 작곡자인 안익태의 첫 인터뷰 기사를 쓴 것도 그였고,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을 신문에 처음 소개한 것도 그였다. 문학평론가 지망생인 20대 초반의 청년문학도 이어령의 첫 평론인 ‘우상의 파괴’를 신문에 실어준 것도 한운사였다. 그가 딱 한 차례 관장한 55년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는 그의 대학 후배인 오상원이 당선, 정한숙이 입선해 문단에 데뷔했다.

유네스코 재직 중 ‘휠체어의 육군 대령’ 김기인을 만나 반년 동안 취재하여 첫 장편소설 ‘이 생명 다하도록’을 쓰면서 한운사는 본격적인 글쓰기의 길에 들어섰다. 이 작품이 입체 낭독의 형식으로 KBS 라디오의 전파를 타면서 청취율이 치솟았고,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뒤이어 자신의 학병 시절 체험을 그린 ‘현해탄은 알고 있다’ 역시 KBS 라디오의 연속극으로 방송되면서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로 꼽히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을 소설로 다시 써 정음사에 의해 출판되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한국일보가 그 속편 격인 ‘현해탄은 말이 없다’를 연재하기에 이른다. 한운사로서는 첫 신문 연재 소설이었다. 뒤이어 당시 최고의 지성적인 잡지로 꼽히던 ‘사상계’에 ‘아로운 전(傳)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승자와 패자’를 연재하면서 그는 ‘주목받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그에게는 ‘소설가’나 ‘작가’보다는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녔다. 그에게는 그것이 몹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인 것 같았다. 그것은 입체낭독이든 드라마든 방송을 탄 작품은 예술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칼럼으로 쓰거나 지인들에게 하소연하듯 털어놓곤 했다. 어쨌거나 한운사는 소설을 쓰면서도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소설가 자격’으로 가입한 유일한 문학단체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였다. 그것도 성북동에 살던 시절 이웃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 전광용의 간곡한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전광용은 학과는 다르지만 서울대 동기였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운사는 많은 문인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의 방송드라마가 인기 절정일 때는 몇몇 소설가·시인들이 드라마 작법을 배우겠다며 그의 집을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한운사는 평생 정계·관계·재계·학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수많은 인사와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었고 그것은 그의 문필생활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외교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엄영달을 주인공으로 한 신문 연재 소설 ‘대야망’이 좋은 예다.

한운사와 가까웠던 사람들 간에 이해관계가 얽히다 보니 그의 입장만 난처해진 경우도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92년의 일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한 가운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그해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한운사는 YS와 서울대 동기생으로 일찍부터 말을 놓는 막역한 사이였고, 정주영과는 80년대 이후 급속하게 가까워져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한데 통일국민당 창당 발기인 속에 한운사의 이름이 들어 있었고 그 무렵 어떤 모임에서 YS와 한운사는 맞부딪히게 되었다. YS는 한운사를 향해 “늘그막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삿대질을 하면서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래도 선거 뒤 한운사는 팩스로 김영삼 캠프에 축하인사를 보냈다던가.

어쨌거나 한운사는 일평생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을 내키는 대로 해내고 2009년 8월 11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는 재일동포 노인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주기 때는 그 공적을 기려 일본 교토의 노인 홈 ‘고향의 집’이 그 부설 문화관을 ‘운사의 집’으로 명명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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