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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국 대신 지루한 천국 스위스를 배워라

중앙선데이 2011.08.14 00:55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영국은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

영국 거주 경험이 있는 한국인 친구들이 영국인인 내게 종종 하는 말이다. 하지만 어제 서울의 깔끔한 지하철 속에서 ‘서울이 좋아요!’라는 메시지의 광고판을 보며 문득 ‘이젠 반대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영국에서 벌어진 폭력적 상황을 볼 때 영국은 더 이상 지루한 곳도, 천국 같은 곳도 아니다.



로열 웨딩과 미지근한 홍차 그리고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나라인 영국이 어쩌다가 무섭고 폭력적인 장소로 변해 버렸을까. 다들 제각각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문제가 촉발된 상황을 보면 인종 차별도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크 더건이라는 29세 흑인이 백인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인종 차별 이슈는 1980년대에도 불거졌다. 하지만 이번 폭력 사태가 증폭된 상황을 보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세력들이 주인공임이 드러난다.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들이 폭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거창한 구호와 이념적 목표를 위해 떨쳐 일어난 게 아니다. 단지 가게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는 것에 몰두했다.



옥스퍼드대 동기인 내 지인은(참고로 그는 극좌파다) 이들이 오랜 기간 기다려온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폭도들이 소비주의 문화의 ‘토템(상징)’과 같은 대형 스크린 TV, 스마트폰을 약탈했다는 점은 이들이 좌파 혁명을 했다는 해석을 무색하게 한다. 레닌은 국가 조직을 깨라고 했지 루이뷔통 매장의 유리창을 깨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리더십을 지적하는 것도 꽤 유혹적이다. 누가 봐도 상류층인 캐머런 총리가 주도한 긴축재정 정책 때문에 평범한 빈곤층의 삶이 조금 어렵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총리직에 오른 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반면 영국의 폭력적 분노는 그 뿌리가 깊다. 그리고 이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은 ‘최하위 계층’이라는 거짓 정체성을 쓰고 있다.



문제의 시작은 제조업 쇠퇴였다. 이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 기회다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을 의미했다. 한두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자격 미달인 평범한 이들도(내 아버지처럼 15세에 자퇴한 경우를 포함해) 동네 공장에서 꾸준히 일하면 관리자급까지 오를 수 있었다. 가족 부양에도 별 문제 없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어 영국의 고임금 노동력은 경쟁력이 없고, 영국의 미래는 서비스업에 있다는 진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변호사·회계사·은행가·경영 컨설턴트가 뜨는 직종이 됐다. 제조업? 중국더러 하라지. 이런 사고 방식이 팽배했다.



똑같이 제조업 위기에 봉착한 스위스나 독일은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이들은 중국이 넘볼 수 없는 고부가 제조업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위스는 선진국 중 대학 진학률은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자 계급에게도 화이트칼라처럼 풍부한 기회를 준다. 반면 영국은 학력 미달 (그러나 기술력은 있는) 세대를 내팽개쳤다. 영국의 대다수 회사는 고용 조건으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3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수십만 가장들은 갑자기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최저생활 수준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 실업수당을 받든지. 후자가 더 인기를 끌었음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영국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하며 화가 잔뜩 난 세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당을 지급해 삶을 지탱해 줬다.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란 젊은이들은 학교는 의미가 없고 직업에 대한 야망은 꿈일 뿐이며 유일한 생계 유지법은 보조금에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 빈민은 더 늘어났다. 고통·범죄·절망의 ‘레시피’가 완성된 거다.



이런 상황을 보면 분노에 가득 찬 영국 젊은이들이 이제야 폭동을 일으켰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폭도들의 마음을 지배한 건 경찰의 과잉 진압이나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심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는 데 방해되는 건 다 파괴하겠다는 욕심이었다.



단기적으로 필요한 건 폭도에 대한 준엄한 법적 심판이다. 장기적으로 영국은 다시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감히 제언한다. 영국과 같은 선택을 하지 말라. 대안은 스위스처럼 지루한 천국이지, 영국이 아니다.








대니얼 튜더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경제학을 전공한 후 맨체스터대에서 MBA를 땄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처음 방한했으며 지난해 6월부터 서울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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