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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 사건, 105인 사건 … 日, 반제 세력 탄압에 혈안

중앙선데이 2011.08.14 00:25 231호 26면 지면보기
105인 사건에서 검거된 사람들이 공판정에 끌려가고 있다. 일제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무관학교 건설을 분쇄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⑧ 우울한 기운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10년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민중세력에도 불행한 한 해였다. 1910년께 일본 정계는 크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육군과 번벌(藩閥)세력을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중심 세력인데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대표였다. 다른 하나는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 세력으로서 그 후계자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가쓰라와 사이온지가 번갈아 수상으로 집권하던 시대를 가쓰라·사이온지(桂園)시대라고 부른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은 1901년 6월∼1906년 1월,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은 1906년 1월∼1908년 7월 사이였다. 러일전쟁이나 한국 강점 등은 모두 가쓰라 내각 때 자행된다.

일제의 한국 침략 배경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다. 1907년께 일본에서 경제공황이 발생하자 야마가타 세력은 군비 확장 및 해외 식민지 개척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온건파인 사이온지 내각의 하라 다카시(原敬) 내상(內相)이 야마가타의 군비 확장 요구를 거부하면서 두 진영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1 고토쿠 슈스이. 아나키스트인 고토쿠는 ‘일왕 암살 모의’라는 모호한 혐의로 동지 11명과 함께 사형당했다. 2 안창호. 3 양기탁 수형기록표.
청일전쟁 후 일본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면서 부작용도 심해졌다. 그 결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하면서 1901년 5월에는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 등이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사회민주당은 하루 만에 강제 해산되지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은 계속 확산되었다. 일본에는 다수의 러시아 혁명가들이 차르의 압제를 피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서도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운동과 허무당 활동이 전해졌다. 1902년 도쿄대 학생이던 게무야마 센타로(煙山<5C02>太<90CE>)가 근세 무정부주의(近世無政府主義)를 펴내는데, 이 책 때문에 아나키즘이 동아시아에서는 암살·폭동에다 모든 정부 조직을 반대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이 책은 아나키즘에 반대하기 위해 쓰여졌다지만 거꾸로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토쿠 슈스이(1871~1911)는 1901년에 쓴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란 글에서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왕성하도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유행이여. 기세가 요원의 불길과 같으니 세계 만방 모두 두려워 그 발 아래 엎드리고 그를 찬미하고 숭배하여 떠받들지 않는 자가 없다…우리 일본에 이르러서도 일청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래로 상하 모두 이를 향해 열광하는 모양이 마치 고삐 풀린 사나운 말과 같다… 아아, 제국주의여! 유행하는 그대 세력은 우리 20세기를 적광(寂光)의 정토(淨土)로 만들려고 하는가, 아니면 무간(無間) 지옥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가.”

한국에서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것은 민중의 지지라도 받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고토쿠는 러시아와도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하는데, 1903년 만조보(滿朝報)가 전쟁 찬성으로 돌아서자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함께 퇴사해서 평민사(平民社)를 차리고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고토쿠는 평민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반전활동에 나섰고, 평민신문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 지배론이 본격화하자 “기요모리(淸盛)의 갑옷이 드디어 법의(法衣)의 소매에서 다 나왔다. 마각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평민신문은 1905년 1월 64호로 폐간되었고, 금고형을 받은 고토쿠는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7년 11월 3일의 천장절(天長節:일왕 생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암살주의’라는 제목을 붙인 ‘메이지 천황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재빨리 메이지 일왕을 만나 사이온지 내각이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 단속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메이지는 요코다(橫田) 대심원장(대법원장), 마쓰무로(松室) 검사총장, 하라(原) 내상을 불러 주의를 촉구했다. 1908년 6월 도쿄 간다(神田) 금휘여관(錦輝館)에서 열린 야마구치 요시조(山口義三)의 출옥 환영식이 ‘적기사건(赤旗事件)’으로 번지면서 사이온지 내각은 퇴진하게 된다.

야마구치는 1907년 3월 평민신문에 일본의 봉건적 가족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모를 걷어차라(父母を蹴れ)’를 발표했다가 1년2개월간 복역하고 석방되었는데, 환영식에서 ‘무정부공산(無政府共産)’ 등을 새긴 적기(赤旗)를 흔들다가 경찰과 충돌해 13명이 기소되었다. 사이온지 내각은 총사직하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이 출범했다. 사이온지 내각이 야마가타 같은 원로들에게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가쓰라 내각은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일망타진을 노렸다.

1910년 3월 기계직공이던 미야시타 다기치(宮下太吉)가 폭발물 취체(取締) 위반혐의로 체포되면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이 시작되었다. 가쓰라 내각은 이 사건을 천황 암살 모의사건이라면서 수백 명의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를 검거했다. 가쓰라 내각 출범 직후인 1908년 10월부터 시행(1947년 삭제)된 형법 제73조는 “천황·천황태후·황후·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위해를 가하거나 또는 가하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직접적인 위해뿐만 아니라 예비 음모도 처벌하는 규정은 오직 ‘사형’ 하나뿐이었다. 형법 제73조는 최고재판소인 대법원에서 재판하는 단심제였다.

대역사건을 심의한 검사 고야마 마쓰기치(小山松吉)가 일본 사회주의운동사에서 원로 모(某)씨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전한다. 원로 모씨는 야마가타로 추측되는데, 1911년 1월 18일 열린 재판에서 쓰루조 이치로(鶴丈一<90CE>) 재판장은 고토쿠 등 2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중 12명은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불과 일주일 후인 1월 24일 고토쿠(41), 모리치카(31·농업), 오이시(45·의사), 니미우(33·편집자), 우치야마(38·승려) 등 11명이 사형당했고, 다음 날 간노스가(31·기자)가 또 사형당했다.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은 적기사건으로 투옥 중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건졌을 정도였다. 사형당한 간노스가가 “이 사건은 아나키스트의 음모라기보다는 검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음모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할 만큼 가쓰라 내각의 자국민 살해였다.

이런 ‘대역(大逆)사건’의 조선총독부판(版)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과 배경진·박만준 등은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 신천의 이완식 등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하다가 민모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이것이 안악사건(安岳事件)인데,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910년 11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05명이 기소돼 통칭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600여 명이 검거되는데, 대부분 신민회원들이었다. 서울의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 평북의 이승훈(李昇薰), 평양의 안태국(安泰國), 황해도의 김구(金九) 등이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는 이때 갖은 고문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1911년 7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16명의 보안법 위반 판결문’은 일제가 왜 이 사건을 조작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자력(資力) 있는 다수 인민을 동지(同地:서간도)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로 삼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文武) 쌍전(雙全)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舊)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신영토)와 무관학교 설립 저지가 ‘데라우치 암살 미수사건’을 조작한 이유였음을 말해주는 판결문이다. 대한매일신보 1911년 7월 23일자는 안명근은 무기징역, 주진수·양기탁·안태국·임치정 등은 징역 2년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대역사건으로 일본 내 아나키즘·사회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크게 위축되었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자금으로 평남 안태국 15만원, 평북 이승훈 15만원, 황해도 김구 15만원, 강원도 주진수 10만원, 경기도 양기탁 20만원 등을 모금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는데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만주 횡도촌에 망명가들이 도착해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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