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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강림한 ‘유로 지름신’

중앙선데이 2011.08.14 00:22 231호 27면 지면보기
잠결에 휴대전화 문자가 들어오는 신호음에 눈을 떴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광고 문자려니 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얼마 후 같은 소리가 또 난다. 할 수 없이 눈을 부스스 뜨고서 시계를 봤다. 새벽 두 시였다. 혹여 긴급한 연락이 왔나 싶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삶과 믿음

‘EURO…해외정상 승인’.
이게 뭐야? 유로를 그만큼 쓸 수 있다는 안내문자인가? 하고 눈을 비비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 이역만리 유럽 땅에서 내 현금카드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해킹이라는 거구나.

얼른 카드회사로 전화했다. 신호음이 들리고 이어서 기계음성이 시키는 대로 몇 번을 따라가다 뭔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되는지라 다시 시도한 끝에 겨우 사람 음성을 만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암자로 가는 산길에서 등불을 들고 마중 나온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본인 여부를 묻는 몇 가지 물음과 답변을 나누는 사이 또 승인문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날 잡아봐라’하면서 계속 그어대는 모양이다. 소비를 부채질하는 권능을 가진 ‘지름신’이 강림한 것이었다. 겨우 지불중지를 요청하고 이런저런 수습과정을 마치고 나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것처럼 정신마저 아득해 왔다.

사용처가 프랑스 잡화점이라고 했다. 카드는 한국에 있는데 사용하는 사람은 유럽에 있으니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다. 분실신고가 어렵도록 토요일 꼭두새벽을 이용하는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그 한밤중에도 긴급전화를 받아주는 카드회사의 깨어 있는 직원이 있다는 사실에 또 안심했다.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한 셈이다. 만약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면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혹시나 싶어 그 카드로 마지막 결제를 했던 조계사 근처 업소를 찾아가 해킹 사실을 전했다. 혹시 다른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단말기를 확인해 보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에 “주말이 지나야 확인이 가능하다”는 사무적인 어투만 돌아왔다. 괜히 우리 가게를 의심한다는 듯한 모습에 괜한 짓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쁜 마음에 월요일 오전 종로구청에 가서 ‘본인은 그 시간에 한국에 있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카드회사에 제출했다. 세상에! 이런 증명서도 있구나.

언젠가 2박3일짜리 소규모 논강(論講)모임을 주관한 적이 있었다. 편의점과 여타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카드회사였다. 평소 나의 소비성향과 전혀 다른 내용의 결제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혹시 카드를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본인이 맞다”고 대답하고 사정을 설명한 후,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까닭이다.

신용정보사회에서 개인정보가 ‘나쁜 의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면 아무리 편리하고 화려한 제도라 할지라도 이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인 것이다.

신뢰가 무너졌다는 불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득달같이 새 카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하지만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 이달 치 카드사용 명세서는 느릿느릿 도착했다. 다행히 문제의 그 부분은 요금청구에서 제외돼 있었다.

쩝! 이번 일은 이 정도에서 툭툭 털어버려야겠다. 어차피 5일장날 우시장에 송아지를 사러 가는 사람
처럼 만날 현금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원철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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