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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으로 미국 구한 영웅, 수소폭탄 반대하다 적으로 몰려

중앙선데이 2011.08.14 00:20 231호 28면 지면보기
유럽 전선의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나치 독일 패망으로 끝났다. 그러나 아시아의 일본은 결사항전(決死抗戰)했다. 미국은 인류 최초로 개발한 핵폭탄을 일본의 두 도시에 투하했다. ‘현세의 지옥’을 목격한 일본은 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핵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1939년 두 명의 저명한 물리학자는 공동 명의 서한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독일 태생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헝가리 태생 레오 실라르트 등 두 명의 유대인 과학자다. 두 사람은 서한에서 독일에 앞선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촉구했다. 당시 독일은 노벨상 수상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건의를 받아들여 핵 개발에 착수한다. 42년 6월엔 코드명 ‘맨해튼 프로젝트’(공식명칭:Manhattan Engineer District/MED)가 발족된다. 이 극비 사업은 레슬리 그로브스 공병 소장이 총괄했지만 핵무기 설계와 제조를 위한 과학·기술 연구는 유대인 물리·화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지휘했다.

아버지는 사업가, 어머니는 화가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의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섬유 사업가이며 어머니는 화가였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학업에 천재성을 보였다. 과학뿐 아니라 라틴어·그리스어·동양철학·미술 등에 조예가 깊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오펜하이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독일 괴팅겐대에서 수학했다. 당대 최고의 독일 양자 물리학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유대인 막스 보른이 그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에서 한때 공산주의에 경도됐지만 이후 소련 스탈린의 폭정에 실망해 공산주의자들과 거리를 뒀다. 그는 유럽에서 돌아와 캘리포니아공대와 UC 버클리대서 강의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착수와 함께 오펜하이머는 비밀 핵심 부서인 뉴멕시코주 소재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에 임명됐다. 그는 3000여 명의 과학자를 지휘하며 핵무기 개발의 과학 연구를 총괄했다. 이들 중엔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해 유럽 태생 유대인 과학자가 다수 있었다. 후일 수소 폭탄의 시조가 되는 에드워드 텔러(헝가리)와 오이겐 비그너(헝가리), 펠릭스 블록(스위스), 에밀리오 세그레(이탈리아), 스타니스와프 울람(폴란드), 리즈 마이트너(오스트리아), 리처드 파인먼(러시아) 등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표적 유대인 과학자들이다.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테스트’는 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부근 사막에서 진행됐다. 이날 핵실험의 성공으로 인류는 이날 자로 핵시대에 진입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군부는 일본 본토의 지상전보다 핵폭격이 미군의 인명 피해를 줄일 것으로 판단했다. 핵 개발을 부추긴 아인슈타인과 핵무기를 완성한 오펜하이머 등 다수의 과학자는 핵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핵무기의 실전 사용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군부 의도대로 전개됐다. 45년 8월 6일 미군 폭격기 B-29 ‘에놀라 게이’ 호는 포신형 우라늄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려 14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3일 후인 8월 9일엔 플루토늄탄 ‘팻 맨’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8만여 명이 즉사했다. 미국은 그래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8월 19일과 9월 중 고쿠라·니가타 등지에 핵폭탄을 수개 추가 투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이 즉각 항복해 추가 폭격은 취소됐다.

오펜하이머는 성취감 대신 죄책감에 더 시달렸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 손엔 희생자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전후 핵무기 확산을 반대했다. 49년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 조야는 더욱 파괴력이 큰 수소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켰다. 오펜하이머는 통제 불능의 핵 확산 경쟁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수폭 개발에 반대했다. 이런 반대가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줬다.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양
50년대 초 미국은 반공 열풍인 ‘매카시 파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미국 각계의 좌익분자 색출과 추방 운동을 벌였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린 전력이 있고 수폭 개발에 반대한 오펜하이머는 마녀 사냥의 표적이 됐다. 그는 54년 안보 청문회에 불려가 ‘반미국적 행위’와 ‘핵 기밀을 소련에 넘겼는지’에 대해 집중 추궁을 받았다. 심지어 젊은 시절 한때 애인이며 공산주의자였던 진 태틀록, 공산당원 경력의 처 캐서린 해리슨 등과 관련한 사생활에 대해서도 답변해야 하는 수모를 받았다. 미국 과학자연맹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혹독한 심문에 반발했다. 동료 과학자들의 성원으로 그는 더 이상의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물리학 분야 최고 영예인 ‘엔리코 페르미상’ 수여를 결정해 그를 상징적으로 복권시켰다. 오펜하이머는 말년에 프린스턴대 부설 고등연구소에서 후학을 기르다 67년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선 그가 평생 즐겨 듣던 베토벤 현악 4중주를 줄리아드 음대생들이 연주했다.

미국은 오펜하이머의 핵폭탄 개발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미군의 희생을 막았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의 핵무기 확산을 반대하자 미국은 그를 국가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사람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핵이란 무서운 불을 인류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가 이 불의 참혹한 위협에 대해 경고하자 세속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그를 응징하려 했다. 근년에 출간된 오펜하이머 평전에 나온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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