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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엔 화학상, 반핵 운동으로 62년엔 평화상 수상

중앙선데이 2011.08.14 00:18 231호 28면 지면보기
1994년 8월 19일 미국 과학자 라이너스 폴링(사진)이 사망했다. 그는 노벨상 역사상 단독으로 두 번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54년 노벨화학상, 6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노벨상 2관왕 라이너스 폴링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오리건 농대를 졸업한 후 칼텍 대학원에서 X선 회절로 광물의 결정구조를 연구해 2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유럽으로 가 2년간 뮌헨에선 조머펠트, 코펜하겐에선 닐스 보어, 취리히에선 슈뢰딩거 같은 대가들 밑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했다. 그 후 칼텍의 이론화학 조교수가 되어 다시 X선을 활용한 결정 연구와 원자·분자에 관한 양자역학 계산을 병행했다. 5년 동안 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32년에는 화학결합에 전기음성도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전기음성도란 분자 내 원자가 원자 결합에 관여하는 전자를 얼마나 끌어당기는가를 나타내는 정도다. 전기음성도가 크면 공유결합, 작으면 금속결합을 한다. 또 원자 내부의 전기음성도가 균일하지 않으면 이온결합을 한다. 이 화학이론에 양자역학을 적용시켜 오비탈 이론을 정립했다. 39년엔 화학계 불후의 명저인 화학결합의 본질을 집필했다. 그리고 5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한편 그는 분자생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0년대 중반부터 헤모글로빈 조직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산소원자를 얻거나 잃으면 헤모글로빈 조직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발견을 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연구로 확대 적용했다. 당시에도 3대 생명물질이 단백질, RNA, DNA인 것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핵산은 너무 단순해 과학자들은 단백질에 더 무게를 뒀다. 폴링은 X선 회절로 단백질 구조를 연구하고, 37년 가장 잘 찍은 영국의 윌리엄 애스트 버리의 단백질 결정 X선 사진을 양자역학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11년 뒤 48년에 해결책으로 헤모글로빈 조직이 나선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51년에는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제안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는 53년 초 실수를 했다. DNA가 3중 나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틀린 결론이었다.

그의 발표 두 달 뒤 왓슨과 크릭이 DNA의 2중 나선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의 2중 나선구조 발상은 여러 연구 결과를 참고한 덕분이었다. 우선 당시 DNA의 권위자였던 샤가프의 분석 결과에서 힌트를 얻었다. DNA에서 아데닌·티민과 구아닌·시토신의 양이 각각 같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힌트는 ‘DNA를 따로 연구하면서도 이들을 도와줬던’ 프레더릭 윌킨스 덕분에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미공개의 고품질 X선 회절 사진을 보고 얻었다. 그들은 DNA의 2중나선이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 염기쌍으로 결합한다는 짧은 논문을 발표했다. 62년 왓슨, 크릭, 윌킨스 세 사람은 ‘핵산의 분자구조와 유전정보 전달에 관한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만약 폴링이 논문 발표 전에 명료하게 찍힌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을 보았다면 DNA의 구조를 3중이 아닌 2중나선으로 수정했을 것이고 그 결과 노벨의학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2003년 왓슨이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폴링은 머리가 너무 좋아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아 잘못한 것이다. 실제로 폴링은 3중 나선구조 논문을 쓰기 전 영국 방문도 했었고, 프랭클린의 실험 결과를 볼 기회도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그런데 폴링은 양자역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핵실험 반대운동에 앞장을 섰다. 57년부터는 대기 중 핵실험 금지를 위한 강연활동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58년엔 미국인 2000여 명을 포함한 49개국 1만1000여 명의 과학자가 서명한 청원서를 주도해 유엔에 제출했다. 그리고 더 이상 전쟁은 그만이라는 책도 냈다. 그 결과로 6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폴링은 두 번의 노벨상 수상 때 모두 조국인 미국에서 환영보다는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5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과 미·소 냉전체제 때문이었다. 52년 영국에서 열린 단백질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았을 때 미 국무부는 그에게 공산주의 혐의가 있다며 여권을 주지 않아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다. 두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 결정에 대해서도 당시 ‘라이프’ 잡지는 제목을 ‘노르웨이에서의 이상한 모욕’이라고 했다.

그러나 라이너스 폴링은 빠른 통찰력과 끊임없는 에너지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65세부터는 비타민C의 효능을 확신해서 ‘비타민C를 복용하면 감기는 물론 암까지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책도 냈다. 죽을 때까지 비타민C로 암을 치료한다며 비타민C를 다량 복용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비과학적 태도로 살았다는 비난과 ‘비타민C의 아버지’라는 칭찬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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