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자 우대’에 성난 프랑스 유학생들 중법대 점거 시위

중앙선데이 2011.08.14 00:17 231호 29면 지면보기
저우언라이(첫째 줄 왼쪽 넷째)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후일의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 첫째 줄 왼쪽 첫째가 10원수(元帥) 중 한 명인 녜룽전(聂榮臻·섭영진), 넷째 줄 왼쪽 다섯째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1924년 7월, 프랑스 파리.  [김명호 제공]
1921년 2월 28일 멍다얼파가 중심이 된 근공검학생들이 파리의 중국공사관을 포위하고 구학권과 생존권을 청원하던 날, 톈진(天津) 익세보(益世報) 유럽 주재 통신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노동운동을 취재하느라 영국에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0>

중국공사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경찰이 중국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듣자 저우언라이는 울화통이 터졌다. “동료들이 이국 땅에서 남의 나라 경찰에게, 그것도 중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공사의 요청으로 얻어 터지다니….” 모든 일정을 때려 치우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사건의 원인과 진행을 파악한 후 한동안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월 9일부터 일주일간 익세보에 저우언라이의 글이 연재됐다. 화법(華法)교육회를 만들어 근공검학운동을 제창한 리스청(李石曾·이석증),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 등을 “감언이설로 중국 학생들을 프랑스의 노동력 결핍 해소에 동원해 경자(庚子)년 의화단 사건 때 갈취당한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고, 목적이 달성되자 유학생들을 헌신짝 취급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며 28운동을 소개했다.

프랑스 리옹에 있던 중법대학(中法大學). 1921년 9월 개방을 요구하는 근공검학생들에게 점령당했다.
프랑스 정부가 게워낸 배상금 중 일부를 중국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화법교육회는 리옹에 중국(中)과 프랑스(法)의 우호를 상징하는 중법(中法)대학을 설립했다. 학교 측은 중국에서 학생들을 모집했다. 입학 규정을 엄격히 하고 등록금을 비싸게 책정했다. 부모가 부자가 아니면 꿈도 못 꿀 정도였다. 근공검학생들은 입학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유가 있었다. 학교 운영비가 부족했고, 학력 수준이 너무 들쑥날쑥했다. 연령도 12세에서 52세까지 각양각색이었다.

28운동을 계기로 연합에 성공한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은 중법대학 입학운동을 추진했다. 9월 20일 밤 학생 100여 명을 대동하고 파리를 떠났다. 이튿날 새벽 리옹역, 책가방을 든 중국 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리더니 몇 명씩 짝을 지어 산 중턱으로 향했다. 그곳에 포대(砲臺)를 개조한 중법대학이 있었다. 올라간 학생들이 내려오지 않자 역전 파출소에 있는 프랑스 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개교까지는 아직도 여러 날이 남아 있었다.

근공검학생들은 무조건 입학을 요구하며 중법대학을 점령했다. 당황한 리옹시 당국은 무장경찰을 동원해 중국 학생들을 연행, 군부대에 구금했다. 차이허썬이 리옹으로 달려온 우즈후이와 군부대에서 담판하는 동안 파리에 남아 있던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사관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모두 결렬됐다. 10월 10일 감금돼 있던 학생들은 단식 항의로 신해혁명 10주년 기념을 대신했다.

프랑스 정부가 강제 송환을 결정하자 차이허썬과 자오스옌은 대책을 논의, 차이허썬과 천이(陳毅·진의) 등은 귀국하고 자오스옌은 프랑스에 남아 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몇 달 전 자오스옌이 “공산주의 동맹회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자 차이허썬도 “소년공산당을 만들자”고 동의하며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을 대리인으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자오스옌은 군부대의 담을 넘었다. 탈출에 성공한 자오스옌은 베트남 친구 호찌민(胡志明·호지명)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책임자 장선푸(張申府·장신부)에게 소년공산당 건립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장선푸는 자오스옌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입당시킨 저우언라이에게 창당 공작을 일임했다.

자오스옌과 저우언라이는 연명으로 리웨이한에게 서신을 보냈다. 세 사람은 파리의 작은 여관방에서 소년공산당 창당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계속)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