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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주권 회복

중앙선데이 2011.08.14 00:16 231호 29면 지면보기
‘자본의 국적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주장이 득세하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 빠른 경제성장과 외환위기 등으로 한 푼의 달러가 아쉬웠던 한국이기에 그랬다. 우리는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금융시장이 선진화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김광기의 시장 헤집기

한국은 해외 차관을 끌어들여 경제개발의 밑천으로 썼지만 증권시장 개방에는 조심스러웠다. 1992년 들어서야 외국인 투자가들이 국내 증시에서 주식을 직접 사고팔도록 허용했다. 그것도 10% 투자한도를 엄격히 지켰다. 외국 자본이 빈번히 들락거리며 주가와 환율이 널뛰고, 기업 경영권까지 위협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증시 개방은 초기에 순기능이 컸다. 무엇보다 증시 투자 행태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름하여 ‘가치투자 혁명’이다. 국내 투자자들은 주식의 내재가치를 중시해 투자하는 법을 잘 몰랐다. 그저 단순 주가가 낮거나 루머를 타는 종목을 좋아했다. 하지만 외국인이 들어와 저PER(주가수익비율)·저PBR(주가순자산비율) 우량주들을 사들였고, 이를 국내에 전파했다.

정부는 증시의 성장 속도에 맞춰 외국인 투자한도를 5% 정도씩 단계적으로 높여 나갔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 게 흐트러졌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은 구제금융의 대가로 한국 주식시장의 완전 개방을 요구했다. 정부는 굴복했고 20%대였던 외국인 한도는 98년 단번에 100%로 확대됐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살아나자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을 거침없이 사들였다. 외국인 비중은 2004년 40%대로 치솟았다. 거꾸로 국내 기관투자가의 비중은 10% 밑으로 쪼그라들었다. 주객 전도도 유분수였다. 외국인들은 시장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한국 증시는 고성능 현금인출기(ATM)로 통했다.

그 폐해는 더 이상 용인하기 힘들 지경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그랬고, 지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유럽과 미국에 재정위기가 터졌는데, 정작 이들 지역보다 한국의 주가·환율이 더 크게 요동친다. 8월 들어 한국 증시의 하락률은 미·유럽의 두 배 수준이다. 가격 하락의 고통을 넘어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자초한 일인 것을. 다급해서 싼값에라도 팔고 떠나겠다니 오히려 감사를 표시하며 정중히 보내드리는 수밖에.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현재 31% 선인 증시의 외국인 비중을 선진국 평균인 20%까지는 떨어뜨려야 한다. 다행인 것은 국내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됐고, 연·기금을 중심으로 여유 자금도 넘쳐나는 상황이다.

미국 증시도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미국이 신흥국이었던 19세기 후반 엄청난 물량의 주식이 유럽 투자가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20세기 들어 주식 되사들이기가 왕성했다. 금융의 역사는 이를 주식의 미국화(Americanization)로 기록한다. 이제 우리도 주식의 한국화(Koreanization) 시대를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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