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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지키려면 바꿔라

중앙일보 2011.08.13 01:23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문명의 갑옷이 이리 약할지 몰랐습니다. 칼이나 화살, 총탄까지 막아낼 것처럼 보이더니 날아온 조약돌 하나에 산산조각나고 맙니다. 생존 본능만 있는 미개지도 아니고 한걸음만 마을을 벗어나도 강도가 들끓던 중세시대도 아닌, 오늘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대낮에 약탈과 방화, 폭력이 춤을 춥니다. 공연히 신난 불량배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멀쩡한 청소년들조차 거리낌 없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댑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절망한 젊음들이 마찬가지로 거리를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파리 근교 위성도시에서 그쳤습니다.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자동차가 불타고 상점 유리창이 박살나리라고는 프랑스 폭도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젊은 세대의 절망이 그만큼 더 커지고 깊어진 겁니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건 그것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아섭니다. 유럽의 젊은이들을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한 청년실업 문제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본 젊은이의 절규가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밖에 되지 않을지언정 나의 가치를 찾으려 나왔어요.” 열아홉 살 이 청년은 일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청년처럼 폭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의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젊은이들이 이 땅에도 얼마나 많을까요.



 젊은 세대의 표류는 경제 실패의 탓이 아닙니다. 정치가 실패한 때문이지요. 흔히 못 가진 자들을 연민하고 분배를 우선시하는 좌파는 빈곤을 고착시키고 결국 나눠줄 것도 없게 만드는 정책에 매달립니다. 시장을 맹신하고 성장을 지상과제로 삼는 우파는 시장이 붕괴될 때까지 몰아붙이다 끝내 성장의 결실을 거품으로 날려버리고 맙니다. 경제가 좌우 어느 한쪽에 쏠리지 말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정치가 그렇게 만들질 않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오락가락하는 겁니다. 인기만을 좇는 포퓰리즘에 배가 산으로 갑니다. 민주·공화 양당이 복지정책 경쟁과 극한 정쟁을 벌이다 국가 신인도가 하락한 것이 이번 금융위기의 원인 아닙니까.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의 파산위기 역시 무분별한 퍼주기 경쟁에 따른 재정 파탄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네 정치판이 미국·유럽과 다르지 않은 길을 걷고 있기에 영국 폭동이 더욱 남의 일 같지 않은 겁니다. 무상급식 얘기가 나오자 반대쪽에서 무상보육으로 받아치고, 반값 등록금을 외치며 목소리 크기를 겨룹니다. 저축은행이 문제가 되니까 예금자 보호하겠다고 나중이야 어찌됐건 나라 곳간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불역(不易)’과 ‘유행(流行)’이란 말을 했습니다. 불역이란 변하지 않는 원칙을 말합니다. 유행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원칙을 지키며 혁신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이 말은 그가 92세가 되던 지난해 쓴 『보수의 유언』이라는 책에서 보수 정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꼭 보수세력에만 들어맞는 건 아닐 겁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속성을 가진 진보세력 역시 꼭 지켜야 할 가치는 있으니까요.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면 좌파가 할 일은 이상만 좇는 눈을 현실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는 일일 겁니다. 분배와 복지라는 이상을 좇다 나라 곳간이 비면 제일 먼저 고통을 받을 사람들은 그들이 연민하는 서민들일 테니까 말이지요.



 우파의 경우는 더욱 명백합니다. 인기를 좇아 좌파의 길로 방향을 트는 게 아닙니다. 탐욕과 부패를 씻어내는 게 우선입니다. 위장전입 정도는 하자가 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국민들을 설득할 명분을 만들 수 없으니까요. 나카소네 전 총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칸트에게 탐닉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실천이상비판』의 마지막 구절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하지요. 이런 겁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커다란 감격과 감탄, 숭경의 느낌으로 가슴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창공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j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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