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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80·90년대 한국 극장가 휩쓴 서극 감독, 3D 무협영화로 새 도전

중앙일보 2011.08.13 01:06 주말섹션 8면 지면보기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녀유혼’ ‘동방불패’ ‘소오강호’ ‘황비홍’ ‘신용문객잔’…. 1980~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홍콩 누아르와 무협영화는 서극(수이하크·61) 감독이 제작하거나 감독한 작품이 대다수다. ‘아시아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불리며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던 서 감독은 스타 군단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주윤발·장국영·유덕화·이연걸·양조위·양가휘에서 임청하·왕조현·장만옥·엽천문·유가령 등까지 초특급 홍콩 스타들을 키워낸 주역이다. 성룡·원표·홍금보 등 쿵후영화 트리오가 휘청거릴 무렵 새로운 스타일과 화려한 SF 테크닉으로 무장한 새 영화를 선보인 서 감독은 2000년대 잠시 주춤했었다.


난 홍콩의 감독 … 상업성이 생존 방식이다

 그 서 감독이 돌아왔다. 지난해 유덕화·유가령 주연의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됐으며, 홍콩의 아카데미상인 금상장 감독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올해엔 사상 최초의 3D 무술영화 ‘용문비갑’의 연출을 맡았다. 자신이 제작하고, 이혜민이 연출했던 93년작 ‘신용문객잔’의 리메이크다. 양가휘·임청하·장만옥 대신 이연걸·주신·계륜미가 주연했다. 지난달 제10회 뉴욕아시아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서 감독을 만났다.













 

●평생공로상을 받은 소감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 꿈이다. 평생공로상을 받으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평생 어떤 성과를 거두었나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자문해 보게 된다. 몇 년 전에도 홍콩감독협회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적이 있다.”



●뉴욕에서 받는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70년대 뉴욕 거리를 거닐던 초보 영화감독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시 난 다큐멘터리 영화의 스태프로 일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까지 영화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의 한국계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틴 초이와도 함께 작업했다.



 “74년 뉴욕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 크리스가 대표로 있던 다큐멘터리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크리스가 철도 노무자였던 중국계 미국인들과 현대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중국계 미국인들에 대한 다큐 ‘못에서 축까지(From Spike To Spindle)’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 난 영화감독 지망생이었으며, 아시안아메리칸 역사에 대해 관심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크리스와 일하게 됐다. 그해는 아시안아메리칸이 고용 기회의 평등권을 위해 투쟁하던 해였다. 우린 아시안아메리칸 문제에 관심이 있는 흥미로운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지금 오랜만에 뉴욕에 오니 다시 아시안아메리칸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싶어진다.”



●당시 어땠나.



 “그때 난 차이나타운의 중국 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며 다큐멘터리 조수로 일했다.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가난했고, 생존 문제에서 무척 불안정했다. 언젠가 임금을 못 주게 되자 크리스는 보상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우린 매우 일을 열심히 했고, 난 당시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임청하·홍금보·원표가 출연한 ‘촉산’(83)은 특수효과가 무성했다.



 “골든하베스트를 위해 만든 영화였다. ‘촉산’은 중국의 무협지에 ‘스타워즈’의 특수효과팀이 가담한 영화다.”



●‘동방불패’ ‘상하이 블루스’ ‘도마단’ ‘철갑무적 마리아’ ‘신용문객잔’ ‘청사’ 등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강인하다. 남장 여성들도 많다. 어머니가 강인한 분인가(당초 서극 감독은 ‘영웅본색’을 여자들의 영화로 계획했다. 그는 주윤발이 맡았던 역을 ‘예스마담’의 양자경(미셸 여)에게 맡겨 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강인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감독은 자기 작품의 어머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그의 자식들은 그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내 영화 중에서 ‘상하이 블루스’는 내가 처음 여성 캐릭터들을 우선에 둔 작품이었다. 내겐 강인한 여성이 보다 더 흥미롭다.”(서극은 86년 ‘도마단(Peking Opera Blues)’에서 임청하를 남장 여성으로 캐스팅했다. 임청하는 청순하면서도 독특한 패기를 발산했다. 서극은 임청하에게 긴 머리를 자르라고 했고, ‘동방불패’의 주인공으로 출연시켰다. 이연걸이 주연한 ‘황비홍’에서도 관지림은 남성복을 입으며, ‘동방불패’에서 이가흔, ‘칠검’의 양채니도 남장으로 등장한다.)



●2000년대 여러 영화가 나왔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새로운 시작이라 생각하며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고 하고 있었다.”



●장쯔이 주연으로 리메이크작 ‘촉산전’을 만들었는데. 결과에 만족했나.



 “개인적으로 완전한 재난이었다.”



●당신 영화의 엔딩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결별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웃음). 아마도 부모님이 베트남에 이주한 중국인이었고, 그런 가족적 배경이 나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홍콩 반환 때도 이주가 이슈였다. ‘이주의 저주’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다시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감독은 ‘복서’, 제작자는 ‘코치’



●당신에게 영화는 오락인가 예술인가.




 “홍콩의 감독으로서 상업적인 것이 생존의 방법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상업적인 것이 필요조건이며 예술적인 것은 충분조건이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한 적은 결코 없었다. 위대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반드시 예술가로서 다재다능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상업성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때때로 난 무언가 특이한 것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감독이 되고 싶다. 그 경우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한다. 실험을 통해 어떻게 더 재미난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배운다.”



●연출 작품과 제작 작품을 어떻게 결정하나.



 “제작자는 복싱을 하고 있는 감독을 링 바깥에서 지켜보는 코치와 흡사하다. 감독과 나누어 갖는 것은 비전이다. 좋은 제작자는 감독이 훌륭한 영화를 창작할 수 있도록 강점을 활용하고 증진시키게 해준다. 제작 초창기의 몇몇 영화는 내가 연출할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제작을 하고 좋은 친구 감독들이 연출을 하게 됐다.”



●경제 위기 이후 홍콩의 영화산업은.



 “중국 시장이 열린 후 감독들이 투자자들을 선택할 여지가 더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콩의 영화시장은 이전처럼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난 매우 낙관적이다. 난 영화감독들이 매우 창의적이라고 믿는다. 미래에 어떤 종류의 좋은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9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무엇을 배웠나.



 (서극은 97년 할리우드에서 장 클로드 반담과 농구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맨 주연의 ‘더블 팀’, 이듬해 반담과 다시 ‘넉오프(Knock Off)’를 연출했다.)



 “매우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세상 도처에서 온 스태프와 일한 경험이다. 그들은 매우 개인적이며 독특한 스타일과 비전을 갖고 있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 다시 함께 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용문비갑’을 3D로 리메이크하는 이유는.



 “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전까지 3D 영화는 서양의 액션영화가 많았다. 난 중국의 전통적인 것과 3D를 결합하고 싶었다. 무협영화를 3D로 찍으니 이야기 서술 방식도, 편집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용문비갑’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2D와 비슷하나, 한 가지 매우 명백한 장애물은 카메라들의 크기와 무게다. 또 하나는 3D 경험이 별로 없는 효과팀과 함께하는 후반 작업이 어렵다. 그 외에 3D는 재미있다.”



●자막에서 설명이 부족해 아쉽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영화가 외국에 배급될 때 번역은 배급회사가 맡는다. 난 로케이션이나 노래의 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번역에서 빠진다. 좋은 번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유기’ 영화화가 꿈



●어릴 적부터 영화광이었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한 살 때였을 것이다. 열 살 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 영화는 카메라 앞에서 내가 마술을 부리는 것을 찍었다. 난 학교 다닐 때 마술을 배웠고 학교 무대에서 종종 마술 공연도 했다. 그후 8㎜ 카메라를 쓸 수 있게 되자 카메라 앞에서 마술을 하는 것에 점점 더 매혹됐다.”



●독서를 많이 하나. 가장 좋아하는 책은.



 “시간이 나면 많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서유기』다. 언젠가 영화로 각색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80년대 활동하던 뉴웨이브 홍콩 감독들은 대개 영국 유학파가 다수다. 왜 텍사스 유학을 결정했나.



 “열여섯 살 때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정했을 때 내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홍콩의 영화산업에 바로 들어가는 것으로, 어떤 작품이든 주어진다면 엑스트라를 포함해 조수로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외국 학교를 찾아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학도는 유럽을 선호했는데, 난 어디로 가야 할지 솔직히 몰랐다. 그때 텍사스대에서 합격통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게 됐다.”



●80년대 한국에서 홍콩영화는 전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한국영화가 더 잘나가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무엇을 하든 매우 강한 끈기를 지닌 것 같다. 6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내 인상은 울고 짜는 비극적인 드라마들이었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은 멋지게도 다양한 장르로 돌아섰다. 한국 감독들로부터 수많은 놀라움과 흥분을 발견한다. 현재 난 한국 영화산업과 어느 정도 연결돼 있다. 몇몇 한국 감독, 프로듀서들과 친구가 됐으며 후반 영화 작업도 한국에서 진행한다. 내 옆에서 나란히 일하는 한인 프로듀서가 있다. 내 생각에 우린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따질 필요 없이 가족과도 같다. 우린 모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인상적인 한국영화와 감독이 있나.



 “무척 많다. 내가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싶을 뿐이다.”



●인생을 바꾼 영화가 있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 히치콕의 ‘사이코’, 트뤼포의 ‘줄과 짐’, 고다르의 ‘브레스리스’, 그리고 킹 후(호금전)와 이한상 감독의 영화 등이다.”



●본명이 서문광(徐文光)인데, 왜 서극(徐克)으로 바꾸었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름이 단순하길 원했다. 내 본명엔 단어가 너무 많다. 아마도 난 단순한 감독, 단순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걸 반영할지도 모른다. 둘재는 ‘수이하크’가 ‘수이만궝’보다 더 감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크를 선택한 것은 기본적으로 내 가장 좋아하는 사운드이자 극복한다는 의미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진로에 대해 많은 어려움이 있던 10대에 서극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아마도 그때가 내 나이 열여섯이었을 것이다.”



뉴욕중앙일보=박숙희 문화전문기자





서극이 발탁한 배우들



주윤발·장국영·임청하·이연걸 … 서극 만나 대스타 됐다










임청하



서극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로 대만에서 로맨스 영화에 출연했다. 홍콩으로 건너가 서극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다. ‘촉산’(1983년)으로 시작해 ‘도마단’(1986년), ‘동방불패’(1992년), ‘신용문객잔’(1992년)에서 서극과 호흡을 맞췄다. 서극은 임청하를 정통 무협영화의 영웅으로 만들어냈다. 임청하는 영화 ‘동방불패’에서는 원래 남자였지만 무술의 달인이 되면서 남성성을 잃은 양성 인간 ‘동방불패’ 역할을, ‘신용문객잔’에서는 무공이 뛰어난 남장 여인 ‘구모언’ 역할을 맡아 카리스마와 아름다움을 뽐냈다.











주윤발



홍콩 TV 드라마로 데뷔한 주윤발은 틈틈이 영화 진출을 노렸다. 번번이 실패하던 그를 안방극장 스타에서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가 서극이 제작한 ‘영웅본색’(1986년)이다. 코트 자락 휘날리며 성냥개비를 문 채 쌍권총을 쏘아대는 비극적인 주인공 ‘소마’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서극과 주윤발은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범죄 액션영화를 잇따라 만들어 홍콩 누아르의 한 획을 그었다.











장국영



가수로 먼저 성공한 장국영의 영화배우로서 성공은 늦은 편이다. 서극이 제작한 영화 두 편에 잇따라 출연하며 비로소 ‘영화배우 장국영’을 널리 알리게 됐다. 바로 ‘영웅본색’(1986년)과 ‘천녀유혼’(1987년)이다.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다. 암흑가에 발을 담근 형을 둔 경찰 동생 ‘아걸’과 미모의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가난한 세리(稅吏) ‘영채신’ 역으로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굳혔다. 장국영은 생전에 자신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좋아했던 영화가 ‘천녀유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왕조현



대만 청소년 대표 농구선수 출신이다. 선수 시절 TV 인터뷰에서 눈에 띄어 16세 때 광고모델로 데뷔했다. 대만에서 TV 드라마와 영화 조연으로 출연하던 그를 청춘 스타로 키워낸 이가 서극이다. 스무 살이던 1987년 개봉한 ‘천녀유혼’에서 미모의 귀신 ‘섭소천’ 역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신인이었던 왕조현은 기대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며 ‘동방불패’의 임청하와 함께 당대를 평정한 미녀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연걸



중국 베이징 출신으로 중국 전국무술대회에서 5년 연속 우승한 무술 실력을 앞세워 액션배우가 됐다. 데뷔작인 ‘소림사’(1982년)를 비롯해 초창기 중국 대륙에서 주로 활동했다. 서극이 제작 및 감독을 맡은 영화 ‘황비홍’(1991년)에서 청조 말 혼란기의 영웅 ‘황비홍’ 역을 한 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황비홍’ 시리즈의 성공으로 이연걸은 대륙의 벽을 넘어 홍콩을 발판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리썰웨폰 4’ ‘미이라 3’ ‘키스 오브 드래곤’ 등 미국·프랑스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표적인 아시아 배우로 꼽힌다.



박현영 기자

서극 감독
1950년 베트남 호찌민에서 약사의 열여섯 아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열 살 때 8㎜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열세 살 때 홍콩으로 이주한다. 텍사스 사우스메소디스트대를 거쳐 텍사스대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77년 홍콩으로 돌아가 TV 방송국에 입사한 뒤 79년 뉴웨이브의 무협물, 살인 미스터리, SF가 가미된 ‘접변(나비살인)’으로 데뷔. 84년 부인 시남생과 필름워크숍(전영공작실)을 만든 뒤 홍콩영화계의 파워커플이 됐다. 필름워크숍은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을 제작하며 홍콩 누아르를, ‘천녀유혼’ 시리즈로 무협 호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가 하면 ‘동방불패’ ‘소오강호’ ‘황비홍’ 등 정통 무협영화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지난해 유덕화·유가령 주연의 ‘적인걸’까지 40여 편을 감독했고 40여 편을 제작했다. 2004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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