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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웰스파고 아시아 무역금융 담당 박혜아

중앙일보 2011.08.13 01:01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입사시험 수없이 떨어져 봤죠 그래도 멈추지 마세요 숨어 있는 운 찾게 될 겁니다”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졸업→국내 특급호텔 직원→미국 듀크대 경영학석사(MBA)→미 와코비아 은행 국제부 근무(필라델피아)→같은 은행 서울지점 대표→미 초대형 은행인 웰스파고의 아시아지역 무역금융 담당. 박혜아씨의 이력서다. 만 37세 한국 여성이 쌓은 경력으로 결코 나쁘지 않다. 명확한 목표를 세운 뒤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을 것만 같다. 그런데 아니란다. 근무지인 홍콩을 떠나 잠시 서울 출장을 온 그를 만났다.



글=김선하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별다른 실패 없이 살아왔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대학 졸업반 때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정말 수없이 떨어져 봤다. 생각을 바꿔 작은 기업에 지원했지만 역시 낙방이었다. 이번엔 ‘세계를 누비는 국제통상 전문가가 되겠다’며 국내 국제대학원에 지원했다가 또 떨어졌다. MBA를 마친 뒤 미국 기업 취업 때도 숱한 낙방을 경험했다.”



●그래도 꿈과 목표를 잃진 않았을 것 같다.



 “역시 그렇지 않다. 솔직히 어릴 때부터 명확한 꿈이 없었다. 많은 친구가 그랬듯 대학만 가면 다 잘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고, 이른바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1학년 때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나중엔 학교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선발돼 미국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다. 하지만 꿈도 목표도 명확해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만 발견했다. 방송사에서 대학생 인턴 PD로 일한 적도 있다. 이 일에서 적성을 발견해 평생 진로를 결정한 친구도 제법 있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그럼 대학 시절의 성과는 뭐였나.



 “내 전공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것과,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 두 가지였다.”



●별로 성실하게 살지 않았단 건가.



 “또 같은 대답인데(웃음)… 그건 아니다. 많은 낙방 끝에 호텔 입사 시험과 국내 국제대학원 한 곳의 입학시험에 동시에 합격했다. 솔직히 대기업에 합격했다면 대학원은 안 갔을 것이다. 이른바 최고 명문대의 대학원에 붙었다면 호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양쪽 다 애매했다. 그래서 일하면서 대학원에 다녔다. 호텔 새벽근무를 하려면 오전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근무를 마치면 바로 학교로 뛰어가 공부를 했다. 2년간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럼 미국 명문대 MBA는 왜 도전했나.



 “국제대학원을 마쳤지만 내가 기대했던 ‘새 세상’은 펼쳐지지 않더라. MBA 지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명확한 목표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내겐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바꿔보고 싶다는 게 솔직히 가장 큰 목표였다.”



●어학연수·교환학생·MBA까지 했으니 최소한 영어 고민은 없어졌겠다.



 “MBA 과정에서 여름 인턴 근무를 할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 면접을 치르는데 상대방이 미 남부 억양이 강했다. 질문 내용이 말 그대로 ‘삐리리릭~’으로 들리더라. ‘익스큐즈 미’를 세 번째 반복할 때 내가 떨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영어 실력은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될 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 대형 은행에 들어갔나.



 “쉽게 붙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MBA를 마쳤던 때는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고 신규 일자리가 크게 줄었던 때였다. 수십 곳을 떨어졌다. 취업한 은행도 처음엔 합격자가 아닌 대기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창피했지만 직접 필라델피아까지 찾아가 왜 나를 뽑아야 하는지 설득했다.”



●은행에 들어간 뒤엔 어땠나.



 “미국 은행에서 일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했다. 다니던 은행이 세계 금융위기로 2008년 다른 곳에 합병됐을 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일하다 보니 맡은 역할이 되레 커졌다.”



●그럼 이제는 삶의 목표가 분명해졌나.



 “글쎄… 그렇게 찾아 헤맨 꿈과 목표를 어쩌면 평생 못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젠 고민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얻은 것들은 대부분 운 덕분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100번 도전하면 99번은 실패한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단 한 번의 운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는 최근 『서른, 난 아직도』란 제목의 책을 냈다. 책 좀 팔려면 ‘토종 한국인이 미국 명문대 유학 가는 법’ ‘외국 회사 취업하는 법’ ‘억대 연봉의 골드미스 되는 법’ 같은 얘기를 썼어야 할 텐데 이런 내용은 하나도 없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책을 썼나.



 “책 제목을 처음엔 ‘세상은 두 부류다’로 할까 고민했었다. 세상엔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자신이 정말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 나침반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때론 남이 가는 길을 그냥 쫓아갈 수도 있고, 안 가도 되는 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나쁜 것은 가만히 서서 불평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헤매다 보면 적어도 길눈이라도 밝아지지 않겠나.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멈춰서진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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