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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스승 미당 앞에 술 한 잔 못 올린 사연

중앙일보 2011.08.13 00:26 종합 20면 지면보기








이문구의 문인기행

이문구 지음, 에르디아

328쪽, 1만3000원




이 사람의 자기 소개를 들어보자. “여느 때는 통 구변(口辯)이 없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이면서 느닷없이 한번 수다를 떤다 하면 거의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어 종작없이 휩쓸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이 딱 부러지지 못하면 소장수도 더러는 개장수로 보이고 물장수도 때에 따라서는 밥장수로 보이는 법이다.”



 스스로를 ‘못난이’로 낮춰 불렀던 소설가 이문구(1941~2003)다. 한국 문단에서 마당발로 통했던 그다. 좌우를 넘어 ‘인간’을 보여주었던 그가 주변 문인 21명에 대한 글을 모았다. 야담(野談)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다. 이씨 개인의 수더분한 풍치와 구성진 입담, 여기에 여러 문인의 일화가 어울리며 때론 웃음을, 때론 슬픔을 빚어낸다.



 2000년 미당(未堂) 서정주의 영전에 부친 글 한 토막. 이씨는 미당의 제자였으나 그가 발행인으로 있던 출판사에서 낸 『친일문학작품선집』에 미당의 작품을 넣어 스승을 찾아 뵙는 걸 두려워했다. 어쩌다 마주친 공석에서도 속에 탈이 났다며 술자리를 피했는데 그때마다 미당은 이렇게 말했다. “어서 속 고쳐 가지고 오너라, 아아, 우리는 어이튼 한 잔 해야 허거든!” 제자는 스승의 임종 때까지 받들지 못했던 스승의 큰 마음을 그리워한다.



 온갖 문객과 식객이 끊이지 않았던 소설가 김동리(1913~95)는 또 어땠는가. 식객들은 숨과 밥만 축낸 게 아니라 선생의 용돈과 원고료까지 나눠가졌다고 한다. 시인 고은(78)의 인기가 한창이던 무렵, 전국에 ‘가짜 고은’이 부지기로 출몰한 것도 요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신경림(75)의 첫 시집 『농무』가 무허가 유령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사연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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