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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 칼럼] 오세훈, 시장직을 걸어라

중앙일보 2011.08.10 00:28 종합 35면 지면보기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연이어 터져나오는 국내외 대형 사건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100년 만의 폭우와 태풍이 훑고 가더니 미국발 금융쇼크가 한반도를 덮쳤다. 주가가 연일 요동치며 여기저기서 비명이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고 밥그릇 전체가 날아갈 판인데 아이들 점심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좌우 양 진영의 시민단체들만 바쁘게 움직이며 서로 ‘호객행위’를 해보지만 흥행이 영 시원찮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야권에선 공세 수위 조절에 고심이 크다. 투표거부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까 걱정이란다. 공방이 거세지면 자칫 잠잠하던 시민들의 관심만 증폭시켜 주는 역효과를 낳을까 해서다. 민주당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런 저런 고민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읽혀진다.



 열의가 없기는 한나라당이 한술 더 뜬다. 말로는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적극 지원한다고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황우여 원내대표는 ‘무상 보육’을 들고나와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당내엔 주민투표를 통해 오 시장이 대권 후보로 급부상하는 게 아니냐고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투표일인 24일까지는 고작 2주.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33.3%를 얻어야 하는 유효 투표율 달성이 어려울지 모른다. 야권이 바라는 바이겠지만 과연 그게 정답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번 투표는 무상급식을 학생 전원에게 할 건지, 일부 학생에게만 단계적으로 할 건지를 선택하는 거다. 어찌 보면 극히 단순한 사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엔 복지정책의 큰 틀이 갈라지는 이념과 철학의 문제가 담겨 있다. 한쪽 방향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복지혜택을 똑같이 주자는 보편적 복지다. 그 밑바탕엔 평등 분배의 논리가 깔려 있다. 또 다른 축은 부자는 빼고 가난한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자는 선별적 복지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지정책의 효율을 기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 결과는 의료·보육·노인 등 복지정책 전반으로 영향이 미칠 게 뻔하다. 어떠한 복지정책의 길을 택할 것인가.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번 투표야말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지켜내느냐, 아니면 사회주의 쪽으로 크게 방향을 선회하느냐는 갈림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부에선 지방정부 행사를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뜨악해한다. 그러나 이게 어디 서울시만의 일인가. 게다가 ‘서울’이 갖는 특별성과 상징성만으로도 이번 투표가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국가의 큰 틀이 좌우되는 중요 정책에 해당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국민적 관심이 모아져야 마땅하다. 복지라는 화두는 그 자체가 뜨거우면서도 품격 높은 토론 주제다. 특히 복지정책은 진보 좌파 진영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던가. 이 좋은 토론 기회를 왜 피하려고만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참여정치’를 줄기차게 외쳐온 야권의 투표거부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정치의 각 주체들에게 권하고 싶다.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 각자의 소신과 철학을 활발하게 개진해 보라. 마침 주요 선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남아있어 이성적 토론도 그만큼 가능하다. 복지가 선거에 휘말리면 십중팔구 포퓰리즘 경쟁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농후하다. 복지 포퓰리즘 경쟁은 과잉복지를 낳고 이는 다시 나라살림 파탄으로 이어진다. 유럽의 여러 복지 선진국들이 좋은 본보기다. 선거에 휘말리기 전에 보수·진보 양 진영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이 나와 격조 높은 토론을 벌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세훈 시장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란다. 투표를 처음 제안하고 발의까지 주도한 ‘주체자’가 오 시장 아니던가. 놀이마당을 벌여놨으면 흥행 또한 책임져야 한다. 투표 결과 유효투표수에 미달하거나 전면 무상급식 찬성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오 시장으로선 패배다. 패배할 경우 오 시장은 자리에서 깨끗하게 물러나는 게 맞다. 한나라당 내엔 오 시장이 신임투표로 가는 걸 반대하는 의견이 다수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비겁하다. 자리를 놓고 우물쭈물한다는 인상이 풍겨지면 정치생명이 끝장날 수 있다. 국민들은 당당하고 멋진 행동을 기대한다. 단호하면서도 산뜻한 리더십. 오 시장에게 남은 카드는 ‘지면 물러나겠다’는 사전 약속 한 가지다. 하루빨리 신임투표를 공표함으로써 결기를 보이고 주민투표의 긴장도도 끌어올리는 게 책임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허남진 정치분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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