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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 처벌받더라도 … 남이건 북이건 가고 싶다”

중앙선데이 2011.08.07 02:58 230호 6면 지면보기
아웅산 테러사건의 실행범으로 체포된 강민철(오른쪽에서 둘째)과 진모(왼쪽에서 둘째)가 1983년 11월 랑군 지방법원 제8특별재판정의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모습. 재판 관련 기사와 함께 현지 신문에 게재된 사진이다. [중앙포토]
북한 정부는 유능한 요원을 양성하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과감한 작전을 수행하지만 투입된 요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폭발이 있은 뒤 3인조의 테러리스트들은 급히 현장에서 탈출하여야 했다. 지침으로는 랑군(양곤의 옛 이름) 강에 쾌속정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며, 이 배가 이들을 하구에 정박하고 있는 모선 ‘동건애국호’까지 데려갈 것이었다.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하>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는 쾌속정은 아무 데도 없었다. 실은 동건애국호는 이때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에 오지도 않았고 인도에서 농약을 싣고 있었다. 이들의 탈출을 위한 계획은 애초부터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도중에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변경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먼저 현장을 이탈한 진모는 하룻밤을 강변에서 노숙한 뒤 다음 날 밤 하류를 향해 수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후 9시쯤 먼저 주민들이 이를 발견해 관민 합동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결국 현지인들에게 에워싸이자 물속에서 일어서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백에서 수류탄을 꺼내 들고 몸짓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위협하였다. 그러고는 바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이 그 사람의 손을 묶고 강변으로 끌어냈다. 중상을 입고 있었지만 살아 있었다.

강민철 등 아웅산 테러범을 태우고 버마 랑군항에 입항한 북한 화물선 동건애국호. [중앙포토]
강민철과 신기철은 쾌속정을 포기한 채 강변의 채소시장으로 가서 배를 빌려 강을 건넜다. 그러고는 강변을 따라 하구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밤이 되자 빈 오두막을 발견하곤 그곳에서 자고 새벽이 되자 다시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신기철이 몹시 시장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 보자고 졸랐다. 강은 위험 부담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계속 조르는 신을 이기지 못하고 부근의 마을 길로 들어섰는데, 어구에서 새벽에 고기를 잡으러 가는 어부 둘을 만나 몸짓으로 자기들을 하구의 타구우드핀 마을로 데려다 달라고 교섭을 하였다. 어부들은 교섭에 응했지만 내심 이들을 수상히 여기고 목적지에 근접하자 이들 중 한 명이 배가 아파서 약을 사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뭍에 올라 바로 경찰과 인민위원회에 신고를 하였다.

버마 의료진 진심 어린 치료에 감동
강과 신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마을의 가게에서 담배 세 갑과 중국제 과자를 샀다. 이때 경찰관 네 명과 마을의 인민위원장이 가게에 들어와 이들에게 우선 휴대하고 있는 가방 검사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마침내 강이 갖고 있던 가방 하나를 열어 보였는데 그 속에는 외국 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들은 결국 파출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다시 가방 검색을 둘러싸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끝내 경찰이 총을 겨누면서 강제로 가방을 빼앗으려 하자 신이 총을 꺼내 들어 총격이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신은 현장에서 죽었고 버마 경찰도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강민철은 밖으로 달아났다. 즉시 현장에 정규군이 투입되어 수색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12일 아침 수상한 사람이 강변에 숨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군경이 그를 둘러싸자 강은 숨어 있던 곳에서 일어섰는데 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었다. 군인 3명이 그를 생포하려 덮치는 순간 그는 왼팔을 치켜들었는데 그 순간 폭발과 함께 강이 “터졌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렇게 하여 테러를 하러 머나먼 곳으로 온 젊은이 셋 중 하나는 죽고 둘은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들을 보낸 사람은 자기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기에만 급급했다.

중상을 입었지만 둘은 모두 회복이 빨랐다. 버마 정부는 외부의 간섭을 일절 차단한 채 이들의 신문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이 모두 조사에 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남한 측의 수사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하던 버마 정부는 10월 25일에야 마침내 남한 측 수사관의 신문을 허락하였다. 부상으로 시력을 잃은 진모는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이었지만 강은 자신이 남한 출신이며 성북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진술은 곧 허위임이 드러났다. 성북초등학교 졸업생 중에 강민철이란 이름은 없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같은 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서울에 있었다. 버마까지 온 경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육로로 왔다고 했다가 구체적인 사항에서 답이 막히자 해상으로 왔다고 했다가 다시 헬리콥터로 왔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측은 이들이 계속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수많은 추측과 억측 가운데 진상이 영원히 묻혀 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마침내 강이 입을 열었다. 11월 3일 강은 버마 측 조사관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하였다.

후일 강은 자기가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상에서 회복되는 과정에 버마 의료진은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특히 간호원 한 명이 친절하게 해 주었는데 북한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보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제한적이지만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북한에서 받은 교육과는 너무 틀린 면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믿었던 조국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이었다. 진모도 마찬가지이지만 강이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전에 바로 터져 오히려 본인이 부상을 입은 것도 자신들을 강제로 자폭하게 하려는 비열한 술책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부는 공작에만 마음을 쓸 뿐 그 이후 요원들의 안전이나 체포되었을 때에 대한 준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당국자들은 자신들은 아무 관련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 이면 교섭으로라도 이들을 구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이들을 사지로 보낸 지휘부는 이들이 미숙하고 무능해 공작을 망쳤다고 비판까지 했으며, 이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은 소홀히 한 자신들의 실책에는 아무런 반성도 없었다. 단지 이들의 동료인 하급 장교들은 드러내 놓고 크게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은연중 이들을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11월 4일 버마 정부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북한의 승인을 취소하고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를 좇아 몇 개의 나라가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그 외에 69개국이 북한을 비난하고 모든 교류를 제한하는 제재를 가하였다. 한바탕의 정치적인 회오리 바람이 지나간 뒤 강민철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일성과 전두환은 이어서 상호간에 접촉을 시작하고 남북 간 교류와 협력, 화해와 궁극적인 통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3년 북한의 수재물자 제의를 받아들인 다음 해에는 남측의 특사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서로 간에 칭찬과 덕담과 함께 선물들을 주고받으며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하였다. 그 와중에 물론 자기들로 인해 먼 나라의 감옥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 젊은이는 까맣게 잊혀졌다.

강민철은 감옥에서 물을 많이 마셨다. 오전 늦은 시간에 아침식사가 나왔고 오후 늦게 점심 겸 저녁식사가 나왔다. 콩과 쌀밥, 삶은 채소 등이 단골 메뉴였다. 한창때의 젊은이에게 이것은 물론 충족한 식사는 아니었다. 면회가 허락된 뒤 라면이나 김치 같은 음식을 받으면 강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서 이것도 중단되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음식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한밤중 잠을 깨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계속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했다. 강은 자기가 성적 경험이 전혀 없는 숫총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감옥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적으로 퇴폐한 행위들에 관해 혐오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은 강한 성격의 청년이었다. 그는 엄격한 자기관리로 건강을 지켜 보통 누구나 20년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인세인 감옥에서 25년이나 버티었다. 운동을 많이 하고 종교에 귀의하여 명상을 하면서 온갖 육체적·정신적인 어려움과 싸워 갔다. 매일 고향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틈틈이 버마어를 배워 첫 면담이 이루어졌을 때는 현지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고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틈이 나면 간수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유언도 못 남긴 채 한줌의 재로
말년 어떤 신문에서 그가 고국으로 가지 않고 미얀마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바로 그는 끝까지 남한이건 북한이건 설혹 처벌을 받을지라도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2003년 강은 20년을 복역한 셈이었고 미얀마 정부는 그를 석방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남한도 북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나마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접촉이던 면회도 2000년대 들어와서 뜸해지고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말년 강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소화불량으로 시작되었지만 후에는 복부 통증으로 발전하였다. 눈에 띄게 체중이 줄면서 안색도 하루가 다르게 병색을 띠었다. 죽기 4개월 전인 2008년 초 양곤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해 4월 병세가 더 악화하였다. 다시 양곤 병원에 입원하여 진단받은 결과 말기 간암이었다. 병원 측도 감옥 당국도 이런 사실을 강에게 알리지 않았고 곧 좋아지리라는 말만 하였다. 약을 복용하였지만 물론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병원의 구급차는 더디게 왔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 그는 차 안에서 숨졌다.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였다. 한국대사관에서 불과 10분 정도 거리인 미니공 교차로에서였다. 극심한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진 채 죽어가는 50대 병자에게서 한때 억세고 당당했던 젊은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민철은 눈을 뜬 채 죽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인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2008년 5월 18일 오후 4시30분이었다. 종교의식은 물론 아무런 장례식도 없었다. 경찰 정보국에서 파견된 1인과 교도관 1인이 병원의 사망진단서를 확인하고 시신을 점검하는 형식적인 절차 끝에 강민철은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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