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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고 웃기는 비결, 개그맨에게 배워야겠어요”

중앙선데이 2011.08.07 02:54 230호 8면 지면보기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는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DJ와 JP의 연대는 더 공고해졌다. 두 사람은 1996년 12월 31일 서울역에서 여당을 비난하는 특별당보를 함께 나눠주며 공조를 과시했다. [중앙포토]
대선을 1년 앞둔 1996년 말, DJ는 변신을 시도했다. 그때까지 DJ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야당 투사’였다.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과 맞서고, 신군부 정권과 싸우면서 얻어진 거였다. 물론 DJ를 공격하는 쪽에선 ‘빨갱이’니 ‘거짓말쟁이’니 하면서 훨씬 극렬한 표현을 썼고, 그를 추앙하는 쪽에선 ‘인동초’니 ‘행동하는 양심’이니 했지만 그건 별개로 하자.

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 이야기<23> DJ의 ‘알부남’ 프로젝트

DJ는 클린턴의 재선에서 많은 걸 배웠다. 집권하려면 좀 더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무서운 집념을 발휘하는 게 DJ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보고 투쟁가라는데 나는 강경한 사람이 아녜요. TV에는 내 연설 중 강경한 부분만 나오는데 내 투쟁 이미지는 보수 세력과 언론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측면이 많아요. 나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예요.” 간지럽게 들리겠지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를 약칭해 ‘알부남’이란 표현도 썼다. 당시 나이가 70대였던 DJ가 사람들에게 “난 알부남이에요”라고 말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음이 알싸해진다. DJ는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했다. TV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면 DJ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여성지들이 인터뷰를 요청하면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동교동 측근들은 DJ가 꽃을 가꾸거나 손주들과 놀아주는 사진들을 최대한 많이 내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DJ는 다른 정치인들이 대부분 외면하던 분야에 눈을 돌렸다. 문화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DJ는 연극과 영화를 보고 나면 어김없이 극작가·배우들과 함께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감명 깊었던 장면과 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자신이 궁금했던 걸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저 사진이나 찍으러 왔겠거니’하고 생각하던 참석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다들 좋아했다. 문화계 인사들 중 상당수가 DJ의 지지자로 변신한 건 그런 배경이 있었다.

당시 DJ가 가장 감명 깊게 봤던 영화는 ‘서편제’였다. 여주인공이던 배우 오정해씨가 결혼할 때는 주례까지 서줬다. 오씨의 남편은 DJ가 대통령이 된 후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과도 사이가 좋았다.

연극인 중에는 손숙씨와 친했는데 손씨는 나중에 환경부 장관을 했다. 그는 DJ 내외에게 티켓을 가지고 찾아와서 연극의 배경을 설명하고 꼭 관람하러 와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가수는 판소리 명창부터 신세대까지 여러 명을 좋아했다. DJ는 가수 이선희씨에 대해선 “왜소한 체구에서 엄청난 목소리가 나온다”고 했고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를 듣고 나서는 “젊은 친구가 기상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판소리 임방울 국창의 ‘쑥대머리’와 ‘심청가’는 테이프를 구해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듣곤 했다. 승용차에서 듣던 또 다른 노래는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인데 나는 그게 DJ가 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100만 인파를 모았던 것과 상관있지는 않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중 백미는 96년 12월 6일 여의도 63빌딩 중국집 백리향에서 있었던 개그맨 부부들과의 만남이다. 탤런트 출신인 정한용 의원이 주선했다. 이들을 만나러 가기 전 DJ가 말했다. “나도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개그맨들은 복잡한 걸 쉽게 설명하고 청중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요. 그 비결을 배워야겠어요.” 나는 속으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정도의 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의 주제는 ‘정치와 웃음’이라고 했다. 최양락과 팽현숙, 이봉원과 박미선, 김학래와 임미숙 부부가 참석했다. 나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분명 매우 재미있는 내용이었을 텐데, 확인하지 못해 아쉽다.

이렇게 부드러운 온건보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던 와중에 대응이 쉽지 않은 문제가 터졌다. YS(김영삼 대통령)가 12월 초에 노동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복수노조 3년간 유예, 제3자 개입금지 명문화, 파업대체 근로제 등이 핵심이었다. YS는 그게 자신의 마지막 개혁작업이라고 공언했다.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일부 조항 때문에 재계도 크게 환영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DJ는 어정쩡했다. 일방적으로 노동계 편만 들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자민련과 JP(김종필 총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계만 두둔하면 DJP 공조에 균열이 생길 게 뻔했다.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가던 온건한 이미지에도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진퇴양난이었다. 12월 4일, 방용석 당 노동특위 위원장이 보고를 했다. 나중에 노동부 장관까지 지낸 그는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출신이었다. “노동법 개정안은 노사 자율원칙을 저해하고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야기할 만큼 문제점이 많습니다. 국회 통과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DJ는 곧바로 노동계 입장을 두둔하면서 통과를 막으라고 했을 것이다. 이번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DJ는 여당인 신한국당 의원들 중에서도 반발이 나오고, 자민련도 반대 분위기가 많다는 보고를 받고 난 뒤 비로소 입장을 정리했다. 그날 오후 이수성 총리가 국민회의 당사에 왔다. 노동법 통과를 도와달라는 거였다. DJ는 “노사 양측의 반발도 있고, 시간도 촉박하니 이번엔 어렵다. 내년 초 임시국회 통과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완전 반대가 아니라 좀 더 조율해 내년에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12월 6일 일산 자택에서 DJ가 말했다. “여야 할 것 없이 노동법 연내 처리에 반대하는데 청와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봤으면 좋겠어요. 신한국당 내부 동향과 움직임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아무래도 김영삼씨가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내가 물었다. “총재님, 강행 처리가 가능하겠습니까. 김 대통령은 이미 힘도 없고,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 아닙니까.” DJ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꾸했다. “아직 장 동지가 김 대통령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런 거(레임덕)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 일단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앞뒤 안 보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사람이야. 두고 보라고. 내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야.”
그 무렵, 노동법과는 별개로 DJ로선 성가신 일도 있었다. 12월 10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김원기 의원)가 기념토론회를 열었다. 주제는 ‘97년 대선, 국민통합의 역사적 대전환은 가능한가’였다. 한마디로 DJP는 안 되고, 민주세력 연합을 한 뒤 DJ 대신 제3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가 말했다. “수평적 정권 교체를 위해 DJ는 킹메이커로 물러나고 제3 후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회의는 (DJ의) 대선 4수를 위한 고육책인 자민련과의 연대를 중단하고 민주 대연합론에 기초한 국민회의·민주당·통추 등 과거 민주화 세력과 연대해 제3 후보를 내야 한다. DJP연합은 저항적 지역주의(호남)와 반사적 지역주의(충청)와 향수적 지역주의(대구·경북)를 결합시켜 PK(부산·경남)에 대항하는 역(逆) 지역연합이다.”

이런 내용을 보고했지만 DJ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12일 대전을 방문해 심대평 충남지사와 홍선기 시장의 환영을 받고 오찬을 하면서 통추의 주장을 반박했다. DJ는 “모든 책임 있는 민주세력에 문호를 개방하겠지만 무엇보다 자민련과의 공조가 최우선이다. 단일화만 되면 우리가 이긴다”고 장담했다.

바둑과 골프는 내가 잘 두거나 잘 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실수를 해서 이긴다고 한다. 정치판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새벽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155명이 한강 둔치에 몰래 모여 버스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갔다.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던 이회창 고문과 대중적 지지가 높았던 박찬종 고문도 그 버스 안에 타고 있었다. 의장 공관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잡혀 있던 김수한 국회의장 대신 오세응 부의장이 사회를 봤고, 노동법은 7분 만에 여당 단독 기립표결로 통과됐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분노하고 뭐고 할 게 없었다. 그전에 여론이 먼저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신한국당으로선 차라리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고 육탄전을 벌이다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러면 최소한 책임의 30% 정도는 법안 통과를 물리적으로 저지한 야당에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한국당 지도부는 26일 오전까지는 작전에서 성공했다고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서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여론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 에는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구절이 있다. 96년 12월 말이 딱 그랬다. 정치권의 바람 앞에 모른 척 누워 있던 민심과 여론은 재빨리 일어났다. 분노한 민심을 거스를 수 있는 정치세력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동안 YS정부에 대해 쌓여 왔던 불만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YS정부와 신한국당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DJ와 JP의 입장에선 특별히 나설 것도 없었다. 그저 민심의 흐름과 발맞춰 가면 될 뿐이었다. YS정부는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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