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레 겁먹지 마라, 한쪽 문 닫히면 다른 문 열리더라”

중앙선데이 2011.08.07 02:51 230호 12면 지면보기
민주당 박은수(55·사진) 의원은 두 다리가 불편하다. 태어난 지 10개월 만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평생 목발에 의지한다. 대구 시내에서 작은 시계수리점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가난한 소아마비 소년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주변의 놀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목발 짚고 장애인 권리 위해 뛰는 민주당 박은수 의원

197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가 되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처음엔 법관 임용 심사에서 장애인이란 이유로 탈락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83년 판사가 된 그는 “내가 몸을 의지하는 목발처럼 장애인의 지팡이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줄곧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에 섰다. 88년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연 뒤 장애인 편의시설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장애인 전용버스 운행, 장애인 카풀 운동을 펼쳤다. 18대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그의 싸움은 진행형이다.

박 의원이 지난달 말 장애인 소득보장론이란 책을 내고 이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지난해 3월 장애인연금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의 어려움과 돌파 과정을 정리했다. 인기 없는 분야의 책이지만 울림이 크다. 출판 1개월이 안 돼 초판 1500부가 모두 팔려 나갔다. 영남대 등 몇몇 대학은 다음 학기 사회복지 강의 교재로 채택했다. 박 의원을 만났다. 그의 도전하는 삶과 그가 꿈꾸는 장애인 복지에 대해 들었다.

-어렸을 때 꿈은 뭐였나.
“부모님이 모두 못 배우고 가난했다. 나를 사랑했지만 기대치는 아주 낮았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손에 끌려 대구시청 앞에 간 적이 있다. 도장 파는 가게가 많았다. 도장을 파던 아저씨 옆엔 닳아빠진 목발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뭐든지 하면 살 수 있다’고 되풀이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의 말씀에 용기가 생겼다. 나는 팔이 멀쩡했다. 막상 중학교에 가선 공부를 썩 잘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고맙다 은수야’라고 칭찬했다. 또 ‘공부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고시’라고 권했다. 덜 움직여도 되는 판사가 매력적이었다. 판사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고시 공부가 어려웠을 텐데.
“좋은 인생을 살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고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막상 입학하니 서울대 캠퍼스는 지옥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학교 정문에서 법대까지 2㎞의 길이 끔찍했다.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겉옷은 비에 젖고 속옷은 땀에 젖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강의실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장애인이라고 법관 발령을 못 받았다. 충격이 컸다.”

-그런데도 판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
“당시 사법시험에 합격한 소아마비 장애인이 나 외에 3명이나 더 있었다. 4명 모두 법관 임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임용 탈락 이유는 분명했다. 변호사가 되는 길도 좋았다. 하지만 후배 장애인들을 위해서라도 법원에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법원장 면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법원행정처장을 만났는데 기막힌 답변을 들었다. 그분이 ‘여러분이라면 사과가 여러 개 있을 때 썩은 사과를 먹겠소, 싱싱한 사과를 먹겠소’라고 되물었다. 당시 중앙일보가 이런 스토리를 기사로 다뤄 사회 이슈가 됐다. 박완서 작가, 박재삼 시인 등이 줄지어 칼럼을 썼다. ‘대법원은 인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법원이 장애인을 차별하면 어쩌나’란 내용이었다. 여론에 힘입어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판사가 되니 실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나.
“내 문제는 해결됐다. 판사로 5년6개월간 일했다. 하지만 장애 차별은 계속 이어졌다. 대입 거부 사례는 해마다 되풀이됐다. 나는 여론에 힘입어 요란하게 판사가 됐다. 장애인단체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장애인 문제가 불거지면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판사여서 조금은 덜 자유로웠다. 게다가 가난 탈출은 힘들었다. 내가 4남매의 장남이다. 내 교육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은 대학을 못 갔다. 더 아래 동생은 대학 갈 나이가 됐다.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고 장애인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변호사는 판사와 달리 많이 움직여야 하는 직업 아닌가.
“오히려 장애 때문에 못한 것들에 도전하는 계기가 됐다. 대구 법원 법정은 보통 4층에 있다. 법원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내가 장애인이지만 4층 정도는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었다. 지리산 천왕봉 등정을 계획했다. 3년간 스포츠센터에서 팔 힘을 길렀다. 목발에 의지해 팔공산과 대구 앞산을 올랐다. 그래도 2박3일간의 천왕봉 등정은 힘들었다. 200m 남짓한 마지막 계단 길은 너무 가팔라 기어서 올랐다.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게 평생의 한이니 어쨌든 팔의 힘으로 움직이겠다고 덤볐다. 휠체어 테니스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 하지만 후배 장애인들에게 내 길을 권하고 싶진 않다. 그때 팔이 망가져 지금은 휠체어 탄다. 목발 짚고 다니면 팔이 너무 아프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한 힘이 뭐라고 느끼나.
“‘한쪽 문이 닫치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게 헬렌 켈러의 말이다. 내 인생에서 경험한 진리다. 한쪽만 보고 일찍 포기하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병고로 양약을 삼으라는 말도 있지 않나. 가수 송창식이 얼마 전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좋지 않았던 일이 좋아지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 인생에선 나쁜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내 평소 생각과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이것을 못하면 저것을 하게 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소아마비 장애는 더 큰 장애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행복했다는 얘기인가.
“내 인생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해지고 싶으면 장애인 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이혼 소송을 맡아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많은 사람이 확실하게 이겨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기는 변호사보다 행복을 찾아 주는 변호사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길 때가 아니라 양보하고 배려할 때 행복해진다. 오히려 49대 51 정도로 져주는 게 가장 좋은 인생살이라고 깨닫게 됐다.”

-외국과 비교하면 우리의 장애인 배려는 어떤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질 정도로 제도적 뒷받침이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은 여전히 동정과 연민에 머물고 있다. 장애는 이제 단순한 신체적 특징으로 인식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다. 어려서 장애인이고 늙으면 장애인이다. 여자도 임신하면 장애인이고 굉장히 건장한 청년도 무거운 짐을 지면 그 순간 장애인이다. 우리 사회엔 등록 장애인만 250만 명이다. 의료기술이 발전해 큰 사고가 나도 살려낸다. 구조된 생명을 가치 있는 생명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장애인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최고 복지는 일자리다. 기업주가 마음을 열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