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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정치인 로비 그룹별 할당” 재계 “제정신인가”

중앙일보 2011.08.06 01:31 종합 3면 지면보기



홍준표·손학규·백용호 거명하며 기업별 전담 요청



전경련이 지난달 만든 주요 기업과의 회의 자료. 정치인들을 나눠 맡아 로비를 하자는 내용이었으나 기업들이 반대해 실행하지 않기로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요즘 제정신인가.”(A그룹 고위임원)



 “한심하다. 지금이 옛 군사정권 시절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B그룹 부사장)



 5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엔 온종일 이 단체를 질타하는 주요 대기업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그간 국내 기업과 기업인들의 입장을 앞장서 대변해와 재계의 ‘맏형’ 역할을 자임해온 대표적 민간경제단체였던 곳인 만큼 대기업의 집단 비난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전경련이 이처럼 회원사들인 재계의 집중포화를 맞게 된 발단은 지난달 1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경련은 이날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주요그룹 10여 개사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었다.



 당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자 재계 차원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전경련은 “최근 반(反)대기업 정책이 많이 입법될 것 같으니 주요 그룹들이 핵심적인 정치인들을 나눠 맡아 설득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주요 그룹별로 전담해줄 주요 정치인까지 할당했다.



 전경련은 먼저 청와대 백용호 정책실장과 김효재 정무수석, 김대기 경제수석을 맡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어 A그룹엔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와 민주당 손학규 대표 등을, B그룹엔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와 이주영 정책위의장 등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전경련은 한 발 더 나아가 대가성 로비 아이디어까지 거론했다. 이 단체가 작성한 회의 자료에는 ‘개별 면담과 함께 후원금, 출판기념회, 지역구사업 및 행사 후원, 지역민원 해결 등 추진’이라고 쓰여 있다. 사실상 필요하다면 금품까지 동원해 보자는 제안이다. 현행법상 기업 같은 법인이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건네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참석 기업들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황당한 방법을 동원할 생각을 하느냐”고 질색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다.



 논의는 이렇게 일단락된 듯했지만 5일 당시 회의자료 문건이 유출돼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대기업은 물론 대다수 전경련 회원기업들은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정경유착으로 호된 고통을 치른 기업들에 다른 곳도 아닌 대표적 민간경제단체가 탈·불법적 로비를 제안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C그룹 고위 관계자는 “회의 참석 기업들의 반발로 불발되긴 했지만 전경련이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 자체가 그렇잖아도 들끓고 있는 반기업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고 혀를 찼다.



 회의 자료가 외부에 공개된 데 대해서도 기업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특히 기업들은 ‘후원금, 지역구사업 및 행사 후원…’ 운운한 문구 때문에 마치 대기업들이 모여서 금품으로 정치인들을 회유할 논의를 한 것으로 비춰지게 됐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후폭풍에 휩싸인 전경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파문 진화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전경련 측은 이날 “내부 실무팀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내놓은 것일 뿐 전경련의 공식 입장은 전혀 아니다”고 해명했다. 전경련 사무국의 최고 책임자인 정병철(65) 상근부회장과 이승철(52) 전무에게도 관련 내용을 사전은 물론 사후에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불법인 후원금을 거론한 것에 관해선 “기업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임직원이 정치자금을 후원할 의향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해보자는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전경련 이승철 전무는 “시장경제 원칙과 어긋나는 정책 수립을 함께 막아 보자고 주요 그룹에 협조를 요청한 것인데 일부 내용은 부적절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투명하고 발전적으로 국민·정치권과 관계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양대 손태원(경영학) 교수는 “비록 불발됐지만 금전적 후원 방식 같은 것을 제안했다는 것은 전경련 사무국이 허창수(63·GS그룹 회장) 회장을 제대로 보필해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할 준비가 덜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오는 16일 창립 50주년을 맞는 서울 여의도 전경련 사무국은 온종일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권혁주·한은화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국내 산업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 511개 대기업과 산업협회들이 회원으로 있다. 기업들이 앞장서 경제 발전을 일구자는 취지로 1961년 결성됐다. 재계의 의견을 모아 정부에 산업 정책과 규제 개혁을 건의하고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장경제 이념 교육을 하는 등의 일을 한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의 파트너가 돼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최근 들어서는 초과이익 공유제 같은 정치권의 각종 대기업 압박 정책에 시달리고 있다. 현 회장은 올 2월 취임한 허창수(63) GS그룹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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