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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 타고난 예술가

중앙선데이 2011.07.31 02:23 229호 9면 지면보기
1985년 1월 하순의 어느 날 오후 낯선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기형도’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나의 고등학교 후배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 무렵 나는 계간문예지 ‘문예중앙’의 편집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해 1월 초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 발표를 둘러보던 중 동아일보의 시 당선작 ‘안개’를 읽으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었다. 당선자의 약력에서 그가 ‘현직 중앙일보 기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경찰기자로 뛰고 있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먼저 전화로 인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조만간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1> 기형도, 죽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上

기형도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서너 달 뒤였다. 그의 첫인상은 눈이 깊고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수습을 끝내고 정치부에 배속돼 중앙청을 출입하고 있다며 응석 부리듯 이렇게 말했다. “실은 문화부 일을 하고 싶어 신문사에 입사했는데 제 뜻이 언제 이뤄질는지 답답해요. 혹 정 선배께서 힘이 돼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 뒤 나는 편집국의 몇몇 간부에게 기형도의 뜻을 전했고, 그것이 주효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형도는 86년 봄 마침내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한데 기형도와 예사롭지 않은 운명으로 엮여질 운명이었던지 그해 여름엔가 편집국장이 바뀌면서 나는 다시 중앙일보 문화부의 데스크를 맡게 됐다. ‘한수산 필화사건’과 함께 문화부를 떠난 지 꼭 5년 만의 복귀였다.

나의 문화부 복귀를 가장 반긴 사람은 기형도였다. 그때 문학 담당은 특채된 소설가 양헌석이었고, 기형도는 문화부의 막내가 늘 그랬듯 방송 담당이었다. 기형도는 각 방송사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며 눈에 거슬리는 방송사의 행태와 프로그램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었다. 방송사의 간부들이 떼를 지어 편집국을 찾아와 기형도의 기사에 항의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나는 늘 기형도의 방송 기사를 ‘톤다운’하려 고심했지만 기형도는 막무가내였다.

문화부 데스크를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보(社報) 담당자로부터 문화부와 문화부원들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일 또한 막내 기자의 몫이어서 기형도에게 써 보라고 했더니 선뜻 응낙했다. 기형도가 남긴 많지 않은 글이 그의 사후 샅샅이 발굴 공개됐으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이어서 그 서두 부분을 옮겨볼까 한다. 문화부의 위상을 다소 익살스럽게 혹은 역설적으로 패러디한 글인데 나름대로 기형도의 재기가 엿보인다.

“‘문화면 빼놓으면 신문 뭐 볼 게 있느냐’는 독자들의 아우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토요일마다 연재소설 ‘백두산’(주:황석영의 주말 연재소설)을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는 동료 기자들의 윙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문화부는 외풍이 센 곳이다. 시·소설·평론·영화·연극·TV·음악·미술·무용·음식·미용·패션·종교·교육·가요·고물(?)·학술·어린이·책·바둑·시조…. 누구나 다 간섭하기 좋은 분야들 아닌가.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사람이 이 방면에 박사들인 것이다(실제로는 한두 마디 아는 척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래서 문화부 사람들은 늘 시달린다. 매일같이 신문의 4분의 1을, 어떤 때는 3분의 1(3~4개 면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사를 쓰고 있으면서도 ‘쟤네들은 매일 놀고먹는군’이라는 기가 찬 오해를 받을 때도 그렇고 문화부에 발령이 났다고 하면 ‘아까운 사람 하나 물먹었군’ 하는 전근대적인 동정(?)을 받는 풍토가 또 그렇다.

그러나 사우들이여. 문화부란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다. 오고 싶어도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다. 무한한 인내심과 상상력을 가진, 무엇보다도 가장 부지런하고 인간적인 ‘문화인’들만이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음 열두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라. 무엇인가 여러분들과는 수준이 다른(?) 어딘지 존경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 아닌가.”

그러고 나서 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한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유일한 총각이라 언니들 네 명의 쟁탈전이 볼 만하다. 그 쟁탈전을 은근히 감상 내지 조장하는 게 낙.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당선한 시인. 유머 감각이 탁월한 독설가이자 우울증이 심한 사이코. 팔자에 없는 TV시청으로 일요일 밤잠을 못 자는(TV 주평 쓰느라) 남자. 기사에 너무 멋을 부린다는 질책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문화부의 가수이며 만화가. 순발력 있는 공상가.”

얼마 후 양헌석이 다른 부서로 전출되면서 자연스럽게 문학 담당은 기형도의 몫이었다. 기형도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문학과 문단을 요리했고, 시단에서도 등단 2년차의 신예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눈여겨보니 그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태생적으로 예술적 기질이 몸에 밴 젊은이였다. 술은 별로 즐기지 않았지만 문인들의 술자리에는 비교적 자주 끼어 노래를 청하면 수줍어하면서도 가곡에서 팝송·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노래를 능숙하게 부르곤 했다. 이따금 보여주는 인물 정물 등의 스케치도 상당한 솜씨였다.

하지만 일에 매달려 있지 않고 있을 때의 기형도는 대개 우울하고 우수에 차 보였으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농담 삼아 여자 친구라도 사귀어보라고 권하면 쑥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다. 그 무렵 강석경이 ‘가까운 골짜기’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형도는 강석경 같은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상”이라고 흘리듯 말했다. 내가 거들었다. “좋은 작가고 이상적인 여성인 것은 틀림없지만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되니 여자 친구 삼기도 뭣하고….”

그러자 기형도가 정색을 하며 항변했다. “열 살은 무슨 열 살입니까.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아홉 살이나 열 살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기형도는 좀 서운했던 듯싶었다. 실제로 기형도는 60년생, 강석경은 51년생이니까 정확하게 아홉 살 차이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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