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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추진된 버마 방문 … 안기부선 북 테러 우려해 반대

중앙선데이 2011.07.31 00:31 229호 6면 지면보기
아웅산 폭파 테러 사건 하루 전인 1983년 10월 9일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특별기에 탑승하면서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젊은이 박종철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를 고문한 두 경찰만 지적을 한 채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죽인 형제에 관하여 물으신 하느님에 대한 카인의 대답입니다. 야당들, 부모들, 교사들, 종교 지도자들 모두 한 젊은이의 잔인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학생, 박종철의 기념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
1980년대 초 한반도는 또다시 극적인 사태의 전개로 요동치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고 급기야는 광주에서 대규모의 인명이 희생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민중의 기대를 억압하고 새롭게 집권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에 대한 저항은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분출했다. 그러나 세상의 표면에 일고 있는 소용돌이의 저변 깊은 곳에서는 더 큰 힘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그러나 조바심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은 조용히 항모를 포함한 기동함대를 보냈다.
80년대 초반 남한의 사태는 북한 정권의 지도부로서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남한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여건이 성숙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섣불리 무력을 사용하다가는 오히려 남한 내부의 반동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전과는 달리 미국의 항공모함은 초강대국의 개입 의사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부는 새로운 집권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들끓고 있었고 특히 대통령은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감과 증오의 대상으로 되는 것 같았다. 이를 제거한다면 남한 정권을 약화시키고, ‘혁명적 여건’을 촉진시킬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적어도 남한의 일부 층에는 구원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광주 사태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폭력을 예정하고 있었다. 커다란 힘들이 움직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작은 인간들의 운명이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불과하다.

반기문 실장 ‘국화작전’ 명명
학원가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거의 매일 계속되었지만, 광주 사태의 부담을 진 채 남한 사회는 안정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특히 경제가 회복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83년 남한 정부는 인도를 주안점으로 하는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순방을 계획했는데 취지는 중립국가 외교였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범석이 처음부터 자신의 인도 근무 경험을 기초로 계획을 주도했다. 방문 시기가 10월이어서 장관의 비서실장이던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이 그 계절 꽃의 이름을 따서 ‘국화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그 시절은 남북한 간에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인 세 다툼을 하던 때여서 이 순방계획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버마가 추가된 배경은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 청와대의 특별한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외무부도 안기부도 반대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주무 장관인 이범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 의견을 낸 대통령의 측근 인물을 향해 비속어를 사용하며 반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안기부는 버마가 북한의 테러 위협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지만 대통령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몇 년이 지난 후에 한 미디어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 결정은 대통령 자신의 은퇴 이후를 고려한 조치였다. 전 대통령은 이전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단임으로 임기를 끝낸다는 것을 자신의 주된 정치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충성스러운 측근 한 명이 임기 이후에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버마의 네윈이 그 모델이라는 진언을 했다는 것이다. 즉 버마에서 네윈 체제를 숙지할 기회도 있고 아울러 네윈과 개인적인 교분을 쌓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는 설명이다(이것은 억측이고 버마는 단지 항로상의 편의 때문에 추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 간에 외무부의 반발과 안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마는 일정에 추가됐다. 순방국들 중에는 공식적으로는 인도가 가장 중요한 나라이고 나머지는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와 브루나이였다. 대통령과 정부의 요인들 그리고 주요 기업인들을 포함한 대규모의 순방 일행은 10월 8일 김포 국제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30분 랑군(양곤의 옛 이름)에 도착했다. 대통령 부부가 트랩을 내려 올 때에 21발의 예포가 울리고 버마 대통령인 우산유(U San Yu) 부부와 이계철 한국 대사가 마중을 나왔다. 쾌적한 서울의 가을 날씨와는 달리 랑군은 덥고 습기에 찼다.

아웅산 테러 발생 직후 버마의 실력자 네윈 인민계획당 의장이 전두환 대통령의 숙소인 영빈관으로 찾아와 사과와 함께 범인 색출을 다짐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보다 3주일이나 앞서 3인조의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버마에 비밀리에 상륙했는데, 진모라고 알려진 리더 격인 본명 김진수 소좌와 신기철 그리고 강민철 대위였다. 한국 정부가 대통령의 순방 계획으로 분주한 사이에 북한 정부는 이들을 살해할 준비에 열중한 셈이다. 특히 특수 임무를 부여 받은 3인은 염천 하에서 임무 수행 준비로 고된 훈련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강민철은 마지막 순간에 선발이 되었다.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휘부가 통신 전문가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강을 추가한 것이다. 3인은 9월 9일 버마로 가는 북한 화물선 ‘동건애국호’에 탑승해 항해 도중에는 선실 내에서만 생활을 하고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건애국호는 9월 15일 랑군 강 입구에 도착해 하역작업을 완료했지만 선박의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며칠간 더 체류 허락을 받았다. 그 사이에 3인조는 랑군에 잠입해 북한 외교관의 숙소로 인도되었다. 이틀 후 거사에 쓸 폭발물이 배달되었다. 10월 6일 이들은 거처를 떠나 테러의 현장이 될 아웅산 묘소가 있는 쉐다곤 공원과 칸다기 호수 부근을 정찰했다. 이후 이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노숙을 했고, 다음 날 새벽 2시 아웅산 묘소에 잠입해 동료 두 명이 밑에서 기다리는 사이 신기철이 기념관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진모가 아래에서 폭발물 3개를 올려주자 이를 지붕 속에 감추었다. 한 개는 원거리 작동 폭탄이었고 다른 한 개는 폭발의 충격으로 터지게 돼있는 고성능 폭탄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화재를 일으켜 증거를 인멸할 목적으로 숨긴 소이탄이었다.

강민철 “현장 보이는 곳서 터뜨리자”
9일 아침에는 일찍 약한 비가 뿌렸지만 곧 개고 습기 차지만 좋은 날씨가 되었다. 범행 직전 진모와 강민철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강민철은 아웅산 묘소가 내려다보이는 쉐다곤 파고다 맨 위층에서 원격 조종 장치를 작동해 폭발물을 터뜨리자는 생각이었는데, 진모는 그곳이 관광객이 많아 신변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반대하며 남한 사절단을 태운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거리에서 거사를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사이의 이견에는 공작이 성공한 후의 논공행상을 염두에 둔 면이 있었다. 후일 강은 진모가 이번 공작이 전적으로 자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본국에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강의 의견을 따랐더라면 이들의 작전은 반만의 성공이 아닌 완전한 성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들은 묘소에서 약 1㎞ 떨어진 위자야 극장 앞에서 구경 나온 군중 틈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한국 방문단은 10시 조금 넘어 호텔을 출발해 묘소에 도착한 후 정렬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머무르고 있던 영빈관에서는 10시15분에 그곳에 와서 대통령을 수행해 함께 묘소로 가기로 한 버마 외무장관 유칫흘랭(U Chit Hlaing)이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아 초조하게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약속시간에 4분이 지나 도착했고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로 예정보다 3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북한의 3인조가 군중 틈에서 초조하게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10시24분 검은색 벤츠 한 대가 한국 국기를 날리며 앞뒤에 모터사이클 경호를 달고 그들 앞을 지나갔다. 이 차는 1분 후 묘소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계철 대사였다. 대사는 기다리고 있는 인사들에게 대통령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이 새삼 모습을 정돈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일행은 행사 준비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다. 군중 틈에 섞여 있던 3인조의 리더 진모는 나팔 소리가 난 후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원격 조종 장치를 눌렀다. 현장은 큰 폭발음과 동시에 번갯불 같은 섬광과 아울러 맹렬한 폭풍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캄캄한 암흑에 덮이고 물건들의 파편과 함께 사람의 몸에서 찢겨진 살점들과 뼛조각이 사방에 날리면서 흩어졌다. 그 잔해 밑에 한국 정부의 최고위 관리 17명과 4명의 버마인의 찢겨진 몸들이 널려 있었다. 묘소에 근접하고 있었던 대통령의 차량 행렬은 비상사태를 감지하고는 바로 방향을 돌려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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