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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지키는 안전 장비의 ‘역습’

중앙선데이 2011.07.30 23:11 229호 31면 지면보기
우리 주변에는 이론과 실제 상황 간에 차이 나는 경우가 많다. 에어백이나 헬멧 같은 안전기구의 사용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false sense of secur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위(僞) 안전감’ 혹은 ‘안전 불감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에어백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에어백을 구비한 차의 운전자들이 그렇지 않은 운전자보다 더 많이 다친다는 것이다. 에어백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라 안전장치를 착용한 다음에 생기는 안도감 때문에 사고가, 특히 대형 사고가 더 많이 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헬멧은 대표적인 스포츠 안전 장비다. 알파인 스키, 점프, 아이스하키, 봅슬레이 등의 겨울올림픽 종목에서 헬멧을 사용한다. 머리를 보호하려면 헬멧을 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여러 각도로 생각해 봐야 할 요소들이 있다.

1997년 미국의 한 스키장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2건의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첫 번째 희생자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인 마이클 케네디였다. 그는 활강을 하다 나무와 충돌해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일주일 후에는 팝스타 소니 보노가 역시 스키장에서 머리를 다쳐서 죽었다. 둘은 모두 헬멧을 쓰지 않고 있었다. 유명인사 두 사람이 잇따라 사망하자 언론에서는 스키장 안전 문제를 집중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스키어들에게 헬멧을 씌워야 한다는 의견으로 흘러갔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역시 스키장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고가 헬멧을 착용하자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다행이었다. 헬멧의 착용 여부는 스키어가 결정하는 행위이므로, 헬멧 착용을 하지 않아 사망한 것이라면 스키장으로서는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헬멧 회사는 당연히 이런 추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고 이후 판매량이 40% 이상 증가한 것도 감지덕지인데, 만일 ‘스키장 헬멧 착용 의무화’ 같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된다면 엄청난 수입을 올릴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헬멧의 보호 효과에 대한 연구들이 관심을 모았다. 헬멧은 머리에 가는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시킨다. 하지만 이 완충 효과에는 한계가 있다. 요즘 시판되는 헬멧은 시속 32㎞ 정도까지의 충격에만 유효한 것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스키어의 평균 속도는 시속 40㎞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종목들을 뛰는 선수들의 경기 중 속도는 시속 100㎞를 넘어간다. 즉, 스키를 타다 머리를 다쳐 사망한 사람들 대부분은 헬멧을 썼어도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헬멧이 부상 정도는 줄여줄 수 있다. 하지만 사고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게 더 중요하다. 헬멧 착용 의무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90년대 후반, 필자가 유학 중이던 미국 버먼트대 스키 부상 연구팀은 ‘헬멧이 스키로 인한 두부 손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료를 준비 중이었다. 그 내용은 헬멧을 쓴 스키어가 머리를 더 많이 다쳤다는 것이었다. 잘 돌아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었다. 연구팀은 ‘이 중요한 시점에 그런 결과를 왜 발표하느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헬멧 쓴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치더라’는 얘기는 해석을 잘해야 한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직업 스키선수 등 위험 상황에 많이 노출된 사람들이 헬멧을 많이 쓰기 때문이지만, 역으로 헬멧을 쓴 사람들이 위험한 짓을 많이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맨머리로는 겁이 나서 천천히 달리던 스키어들이 보호장비를 착용하자 고속 질주를 즐기게 되고, 결국 큰 부상을 많이 당한 것이다. 헬멧의 심리적 역효과, 즉 ‘위 안전감’의 전형적인 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겁이 나 고개도 못 들던 병사가 철모 하나 씌워주자 전보다 용감해져서 혼자 ‘돌격 앞으로’ 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이야기를 ‘헬멧을 쓰지 말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헬멧은 예기치 않은 부상을 줄여 주는 유용한 안전기구다. 하지만 헬멧이 무모한 행위를 하는 사람까지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뜻밖의 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는 훌륭한 하드웨어(장비)보다 소프트웨어(안전의식)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은승표 스포츠의학 전문의로 무릎 전방십자인대 수술만 1000회를 돌파한 ‘무릎팍 도사’다. 대한스키협회와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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