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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광기의 십자군 전쟁

중앙일보 2011.07.25 00:27 종합 1면 지면보기



노르웨이 32세 원리주의자
폭탄·총격 93명 대학살
이슬람 이민 정책에 불만
정부청사·노동당캠프 테러



처참한 현장 23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인근 우퇴야 섬 호숫가에 극우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무차별 총격 테러로 살해된 청소년들의 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 있다. [우퇴야 로이터=뉴시스]





2083 : 유럽 독립선언문



십자군 전쟁 시작하기 전에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없애야 …

2083은 이슬람 몰아내는 해다.

대화는 끝났다. 무장항쟁이다.



-테러 직전 인터넷 올린 글에서

414년 역사의 돔키르케 교회(루터교)에서 조종(弔鐘)이 울려 퍼졌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시민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발걸음을 멈췄다. 24일 오전 11시 정각(현지시간) 5분간의 타종이 끝나자 교회에서 애도 예배가 시작됐다.



이틀 전 폭탄 테러와 무차별 총격으로 숨진 93명의 명복을 비는 자리였다. 하랄 5세 국왕 부부와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 등 500여 명의 참석자 얼굴에 침통함이 드리워졌다. “신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가사의 찬송가 합창 때는 눈물바다가 됐다.



 노벨 평화상 수상식이 열리는, 세계 평화의 상징 오슬로는 하루아침에 침묵의 도시가 됐다. 아니, 노르웨이 전체가 비통함에 빠졌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국가적 참극”이라고 표현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 그가 입고 있는 모조 군복에는 해골과 십자가, 가짜 훈장들이 줄줄이 달려있다. [우퇴야 로이터=뉴시스]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테러와 캠핑장 청소년에 대한 총격이 자국민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는 것에 시민들은 더욱 충격을 받았다. 연쇄 테러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이라는 극우 기독교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는 자동소총 등으로 86명의 목숨을 앗은 참사의 현장에서 경찰과 맞닥뜨리자 순순히 투항했다.



 브레이빅은 테러 수시간 전 1500쪽에 이르는 ‘2083: 유럽 독립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시사토론 웹사이트(www.freak.no)에 올렸다. 그는 선언문을 요약한 유튜브에서 “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 이민에 관대한 노르웨이 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선언문은 이민자에 대한 증오심과 광적인 종교관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문화사회를 거부하는 광기 어린 한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대학살극은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확산하고 있는 극우주의 물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테러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민들을 소름 끼치게 했다. 브레이빅의 글은 수개월 동안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학살이 치밀하게 준비됐음을 뜻했다.



그는 “진보주의와 다문화주의로 가장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화의 시기는 끝났다. 무장 항쟁의 시기가 도래했다”며 광기를 드러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브레이빅은 2002년 4월 런던에서 이른바 ‘템플기사단’을 재건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했다. 템플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때인 1118년 성지 순례와 예루살렘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조직이다. 브레이빅은 이 모임에 8개국에서 9명이 참가했고 3명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르웨이 경찰은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다른 참가자들이 테러 계획을 알았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그의 글은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입력이 될 것이다. 현재 시간은 7월 22일 금요일 낮 12시51분이다”로 끝난다. 7명이 희생된 정부 청사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 2시간35분 전이다.



 노르웨이의 테러 전문가인 토마스 헤크함메르는 “브레이빅의 글은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성명서와 빼닮았다”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23일 전했다. 그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적 관점을 가졌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난다”며 “브레이빅의 글과 마찬가지로 알카에다의 주요 성명도 종교·문화적 적을 무찔러야 한다는 종말론적 전쟁을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청사와 주변 건물은 처참히 부서져 있었다. 폭발물이 터진 지점에서 100m가량 떨어진 건물의 유리창도 박살 난 상태였다. 그곳에서 6㎞ 떨어진 곳에 사는 주민도 “폭발음을 들었다”고 말했다. 청사 접근로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소총을 든 군인들도 곳곳에 배치됐다.



 총격 사건은 폭탄 테러 1시간30분 뒤에 오슬로에서 약 30㎞ 떨어져 있는 우퇴야 섬에서 일어났다. 경찰은 민간인의 섬 출입을 통제하고 섬과 주변 호수에서 5명의 실종자를 찾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실종자들은 총격을 피해 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섬에서 호숫가 땅까지의 거리는 약 500m다. 이병현 노르웨이 주재 한국대사는 “한국인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오슬로(노르웨이)=이상언 특파원



◆십자군 전쟁=11~13세기 중세 서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대규모 군사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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