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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시대 농업, 파워 브랜드가 길이다 <1> 국내, 브랜드 홍수

중앙일보 2011.07.25 00:23 경제 2면 지면보기



이름·포장지뿐인 농·축산 브랜드 5340개 난립 … ‘제스프리·선키스트’ 왜 없나



24일 오후 서울 양재동 농협 하나로클럽 쌀 매장에서 소비자들이 쌀을 고르고 있다. 이 매장에서만 서른 개가 넘는 쌀 브랜드가 유통되고 있다. [조문규 기자]





왜 한국에는 선키스트·제스프리 같은 명품 농산물 브랜드가 없을까. 국내 농·축산물 브랜드는 5340개, 쌀 브랜드만 1500개가 넘는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영세하다. 좁은 국내 시장에서 고만고만한 덩치끼리 키 재기로 날을 세운다. 출혈 경쟁을 일삼고 지자체마다 마케팅 비용으로 세금을 펑펑 쏟아 붓지만 소비자 기억에 남는 브랜드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다. 국내 명품 농산물 브랜드 결핍은 생산·소비자 모두에게 손해다. 농민은 제값 받기 어렵고, 소비자는 믿고 사기 어렵다. 이달부터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한국 농산물은 아직 아무 준비·대응책도 없다. 한국의 파워 농산물 브랜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본지가 국내외 현장을 둘러 해법을 찾아봤다. 



#1. 경남 진주시에서 2만1500㎡(약 6500평) 규모의 벼농사를 짓는 강모(62)씨. 그가 같은 논에서 생산한 쌀이지만 브랜드는 2000년 이후 세 번 바뀌었다. 우선 쌀을 도정해 유통해 주는 미곡종합처리소(RPC)를 바꿀 때마다 해당 RPC의 브랜드로 쌀을 출하했다. 그러다 3년 전엔 지역 농협의 브랜드 ‘진주 촉석루 참햇쌀’로 옮겼다. 강씨는 “참새쌀이니 황금쌀이니 하는 브랜드를 붙여봐도 워낙 쌀 브랜드가 많아 소비자들은 잘 구별하지 못한다”며 “농협이 쌀 가격 변동분을 보전해 준다기에 또 브랜드를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2. 주부 김수미(36)씨는 마트에서 농산물을 고를 때마다 아리송하다. 쌀부터 호박·고구마·수박까지 죄다 나름의 브랜드가 붙어 있지만 눈에 익은 브랜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해마다 제철 과일·채소가 나올 때마다 새 브랜드로 바뀌어 나오는 것 같다”며 “어차피 브랜드별 품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브랜드에 상관없이 빛깔·형태 등을 보고 농산물을 고른다”고 말했다.



 국내 농산물 시장이 브랜드 홍수에 빠졌다. 올 6월 말 기준으로 5340개의 토종 농·축산물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본지가 농림수산식품부의 ‘2011 전국 브랜드 현황 보고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다. 그나마 5340개도 각 지자체가 파악하고 있는 숫자가 그 정도다.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출하하는 브랜드를 합치면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쌀은 가장 브랜드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다. 지난해 말 현재 전국 각지에 1548개나 된다. 2006년(1445개)보다 103개(7.1%)가 늘었다. 같은 기간 1인당 쌀 소비량은 2006년 78.8㎏에서 지난해 72.8㎏으로 되레 7.6% 줄었다. 충청남도에만 280개의 브랜드가 있고, 가장 쌀 생산량이 많은 당진군은 44개나 된다. 경상북도(240개)와 전라남도(230개), 경기도(217)도 각각 200개가 넘는 쌀 브랜드를 두고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있다.



 문제는 브랜드가 너무 많다 보니 소비자들이 구별을 잘 못한다는 것. 2009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에선 소비자 인지도 5%가 넘은 쌀 브랜드는 임금님표 이천쌀(29.8%)과 철원 오대쌀(15.2%), 대왕님표 여주쌀(5%) 딱 세 가지였다. 전국에 1002개나 있는 것으로 조사된 과실·과채류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는 대부분 ‘나주 배’ ‘밀양 얼음골 사과’ 같이 유명한 지역 특산품만 지명과 연계해 기억할 뿐이었다. 소비자들이 기억하지도 못할 브랜드를 만드는 데 돈을 쓰고,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에 이렇게 많은 브랜드가 난립하게 된 데는 브랜드가 주로 각 지역의 농축산물 유통센터 단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농식품부 조사에선 전국 912개 RPC에서 평균 1.7개의 브랜드를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 강화군 망월리의 RPC 강화농산에서만 ‘설화’ ‘꿈의햇쌀’ ‘부모마음’ 등 모두 10개의 브랜드로 쌀을 출하하는 식이다. 이 외에도 경기도 화성시의 화성농산, 경기 파주시의 북파주농협, 경기도 연천군의 연천농협 등도 각각 5개 이상의 브랜드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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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지자체까지 공동 브랜드 경쟁에 가세했다. 애초 취지는 브랜드 난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시·군 단위로 공동 브랜드를 만들라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올 6월 기준 전국에서 828개의 시·군 공동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농업이 주력 산업인 시·군·구가 전국에 150여 곳이라고 볼 때 한 지자체마다 평균 5개 이상의 공동 브랜드를 육성한 것이다. 애초 취지와 달리 난립을 부추긴 셈이 됐다.



 반면 시·군 단위를 넘어선 전국 단위 브랜드는 농협 중앙회의 K멜론·햇사레(복숭아) 등과 제주도 공동 브랜드 J마크, 충청남도 공동브랜드 청풍명월 등 10개 안팎이다.



 단순히 이름 짓고 포장지만 꾸미면 브랜드가 탄생한다고 생각하는 인식도 브랜드 난립을 불렀다. 브랜드가 제대로 크기 위해선 지속적인 품질 관리가 핵심인데 외양만 잘 꾸며놓으면 파워 브랜드가 될 거라고 기대하는 산지유통센터와 지자체가 많다는 것이다. 농업 컨설팅업체 지역농업네트워크 박영범 대표는 “브랜드는 단순히 이름 짓기가 아니라 생산과 선별·출하 과정에서 엄격하게 품질이 관리돼야 하는데, 정작 이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브랜드가 많다”고 지적했다.



 영세 브랜드만 난립하다 보니 시장에서 영향력이 큰 ‘파워 브랜드’는 좀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파워브랜드 탄생의 전제 조건을 ‘브랜드 통합을 통한 규모화’라고 보는 이유다. 지역아카데미 박상식 책임연구원은 “브랜드가 지자체 홍보 수단이 아니라 믿음직한 농산물 육성의 발판이 되려면 시·군 경계를 넘어 품목별로 만들어지는 것이 맞다”며 “지역을 초월한 품목 브랜드를 육성하기 위해선 농협 중앙회와 광역 단체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글=임미진 기자·하지혜 대학생 인턴기자(충남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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