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⑤ 독립방략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08년 여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두만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대한제국의 형체는 남아 있었지만 외교권과 군대가 해산된 나라는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망국을 기정사실로 여긴 이회영은 나라를 되찾을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상설을 찾아갔다. 대한제국 보병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1882~1972)은
|
이상설은 “조만간 동양에 다시 전운(戰雲)이 일 것”이라면서 “모든 국력을 저축하여 준비하다가 좋은 기회를 잡아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면 조국 광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설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다. 이상설이 말한 국제 정세, 즉 일본과 미국·중국·러시아가 충돌하는 정세는 1930~1940년대에야 조성된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토의 끝에 네 가지의 운동방침을 정했다.
“1,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 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 4,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
이회영의 집안은 삼한갑족(三韓甲族) 또는 삼한고가(三韓古家)로 불린 명문가였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10대조 이항복(李恒福)을 필두로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이광좌(李光佐)·이종성(李宗城) 등 모두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소론 온건파인 완소(緩少)로서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던 조선 후기에도 탕평책을 명분 삼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도 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했으니 삼한갑족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비밀 결사조직’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그러나 신민회는 상동교회 외에도 영국인 베델(Bethell E.T:裵說)이 발행하던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는 신민회 간부의 비밀회의가 열렸으니… 이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독립기지 건설 건과 군관학교 설치 건이었다… 간부 이회영·이동녕·주진수(朱進洙)·장유순(張裕淳) 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이회영은 남만주를 유력(遊歷:여러 곳을 돌아다님)하며….”
이회영·이동녕·장유순·이관식 등은 1910년 8월 초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이회영 등이 “마치 백지(白紙) 장수같이 백지 몇 권씩 지고 남만주 시찰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 한반도와 지형이 비슷한 압록강 건너편 남만주(서간도) 일대에서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기 위한 도강(渡江)이었다. 이회영 일행이 남만주 일대를 답사하다가 약 한 달 후 귀국하니 나라는 완전히 망해 있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조선은 한일합방 당시라, 공기가 흉흉하여 친일파는 기세등등 살기(殺氣) 험악하고, 배일자(排日者:일본을 배척하는 자)는 한심 처량하지만 어찌하리오”라고 전하고 있다. 공포 분위기가 나라를 뒤덮은 동토(凍土)였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한국민을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 총독이 제령(制令)으로 직접 통치하는 특별 지역이었다. 일왕의 칙령 제324호 1조는 “조선에서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는데, 조선 총독의 명령이 제령이었다. 강제 합병 당일인 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는 ‘조선총독이 발하는 제령은 조선총독이 서명하여 공포 연·원·일을 기입하여 공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거로 구성되는 의회가 아니라 조선 총독에게 입법권도 있다는 뜻이다. 역대 조선 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이 임명되었다.
과거 독립기관이었던 사법청(司法廳)은 총독부의 일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로 격하되어 총독 산하에 두었다. 조선총독은 행정·입법·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전제군주였다. 게다가 군인 신분의 헌병(憲兵)이 칼을 찬 채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헌병 경찰제도를 시행했다. 서울에만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경무총장(警務總長)을 두었을 뿐 각 도는 헌병대장이 경무부장(警務部長:지금의 도경국장)을 겸임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0년 12월 16일자는 조선총독의 제령(制令) 10호인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에 대해 싣고 있다. ‘범죄 즉결처분 사례’라는 뜻인데, 핵심은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 취급자가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그리고 10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재판이 아니라 현역 군인인 헌병 경찰이 자의적으로 구속하거나 벌금형을 내릴 수 있었고, 태형(笞刑)까지 칠 수 있었다. 총독부의 행정명령을 어기면 재판 없이 구속되거나 벌금이 부과되고, 태형까지 맞아야 했다.
1912년 12월 30일자 훈령(訓令) 제40호의 ‘태형 집행 심득(心得:준칙)’ 제1조에 따르면 “수형자를 형판(刑板) 위에 엎드려 눕히고 양팔과 두 다리를 형판에 묶은 다음 바지를 벗기고 둔부(臀部:궁둥이)를 태(笞:매)로 강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는 매국노들과 각지의 양반 사대부들에게 은사금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태형을 포함한 ‘범죄즉결례’로 일반 민중을 위협했다.
물론 은사금을 받고 기뻐 날뛰는 사대부가 있는 반면 이를 거부한 사대부도 있었다. 유학자 송상도(宋相燾)는
이역 만주의 이 작은 마을들이 나라를 되살릴 터전이었다. 이회영은 집안의 세교(世交)를 통해, 교육사업 때 맺은 인맥을 통해, 그리고 신민회를 통해 만주로 망명할 동지들을 물색했다. 망국의 역사는 이렇게 광복의 역사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