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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유럽이 전쟁터로 변하자 그나마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프랑스까지 가는 도중 물고기 밥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전란(戰亂)에 익숙한 민족이었다. “전쟁은 잔치와 똑같다. 끝날 때가 되면 끝난다”며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7>
5월 4일 군벌 정부의 매국외교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베이징에 있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발발했다.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크건 작건 학교 간판이 붙어있는 도시마다 학생운동 지도자를 무더기로 배출했다.
파리에 나가 있던 중국 대표단은 국내 여론을 감안, 조인을 거부했다. 약 2개월에 걸친 학생운동은 결실을 봤지만 학생 지도자들은 맥이 빠졌다.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공검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근공검학은 일하며 공부하는 반공반독(半工半讀)을 의미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보다 격은 떨어지지만 체질에 맞았다.
중앙과 지방정부는 “국내에 있어봤자 사고나 치는 애물단지들”이라며 이들의 출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파리·베이징·상하이에 ‘화법(華法)교육회’를 조직하고 쓰촨·광둥(廣東) 지역에 지회를 설립했다.
프랑스행 여객선 4등 선실에는 어김없이 중국 학생들이 떼거지로 몰려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서삼경을 뒤적거리는 학생과 ‘신청년(新靑年)’을 품에 안은 학생들 사이에 주먹질이 빈발했다. 그래도 눈만 뜨면 부다부청자오(不打不成交), 싸우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서로 어울렸다. 프랑스에 도착할 즈음이면 휴지통에 사서삼경을 내던져 버리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1920년 11월 4개월간 감옥 밥을 먹고 나온 22세의 저우언라이도 톈진(天津) 익세보(益世報) 유럽 통신원 자격으로 프랑스행 선박에 올랐다.
불과 1년 만에 프랑스에는 중국 학생들이 넘쳐났다. 관비(官費) 유학생과 반(半)관비 유학생도 많았지만 근검공학생이 30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근검공학생들은 관비는 ‘자산계급’, 반관비는 ‘반 자산계급’, 자신들은 ‘무산계급’이라며 계급을 확실히 했다.
학생운동을 통해 이론과 전투력을 겸비한 근검공학생들 내부에도 편가름이 심했다. 도표를 그려가며 봐도 뭐가 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구성이 복잡했다. 크게 2개의 집단을 형성했다.
몽타르지(Montargis·蒙達爾紀)에는 중국 학생이 유난히 많았다. 흔히들 멍다얼(蒙達爾)파라고 불렀다. 살아 있었더라면 국가주석 감인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신중국 초대 통전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 어떤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후일 마오쩌둥이 “나의 영원한 회상”이라고 했던 쉐스룬(薛世綸·설세륜) 등이 중심에 있었다.
리웨이한이 만든 ‘공학세계사’가 멍다얼파를 대표했지만, 최고 우두머리는 고향 창사(長沙)에서 마오와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했던 차이허썬이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한 후난(湖南) 출신으로 장악력이 뛰어났다.
다른 한쪽은 쓰촨을 비롯한 모든 지역 출신이 골고루 있었다.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리리싼(李立三·이립삼), 프랑스 여인과 나체 결혼식으로 물의를 일으킨 슝즈난(熊志南·웅지남)과 천궁페이(陳公培·진공배) 등이 조직한 ‘노동학회’가 구심 역할을 했다.
1921년에 들어서자 프랑스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중국 학생들에게 문을 열었지만 공장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프랑스 청년들마저 중국 근검공학생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