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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퇴직 은행장, 외손주 둘 길러보니 …

중앙일보 2011.07.23 00:01 종합 22면 지면보기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

들에 대하여

정석희 지음, 황소자리

264쪽, 1만3000원




눈도 못 뜨고 우는 아기를 반백의 노인이 어르는 표지사진. ‘외할아버지의 손자 키우기’란 부제가 달린 책은 그렇게 독자를 끈다. 무슨 사연이기에 50일 간격으로 태어난 두 외손주가 그의 손에 맡겨진 걸까. 글쓴이의 고백에 따르면 “물려줄 재력도 권력도 없는 아비로서 반듯하게 잘 자란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던 AS”였다. 각각 직장맘인 두 딸이 믿고 의지할 품을 찾았을 때, 글쓴이와 그의 아내는 차마 도리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느 가부장처럼, 아기들을 받아 안고 그가 처음 느낀 것은 육아에 관한 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자괴감이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애들이 다 커있더라는 말처럼,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로서 직장에만 충실하게 살아왔다. 1998년 은행지점장에서 명예퇴직 한 뒤 온전히 몸 담그게 된 ‘가족’이란 공간. 두 손자 도헌·경모를 통해 그는 비로소 용변 가리기, 책 읽어주기, 놀이터 순례 같은 신세계를 체험했다.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4남매를 거뜬히 키워낸 아내의 지휘가 없었다면 엄두 못 낼 일이었다. 그렇게 보낸 3년은 노년에 찾아온 파릇한 봄과 같았다.



 이 각별한 육아 에세이에 담긴 것은 조부모의 외손주 사랑이 다가 아니다. 산업화 시대를 지내온 노인의 눈엔 세월의 깊이가 묻어난다. 장난감을 잃어버려도 며칠 못 가 다른 것을 찾는 손자들을 보며 어릴 적 외가에서 받은 고무공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고 집에 올 때까지 울었던 것을 떠올리는 식이다. 먹을 것, 가진 것이 귀하던 유년 시절. 그 배곯음을 떨치기 위해 일만 하며 보낸 세월 속에 어느새 자식들은 또다른 어버이가 됐다. “조상들이 이루어낸 씨줄과 이 시대의 날줄이 만나, 그 매듭이 비로소 자신을 있게 했다고 아이들이 믿기를 바랄 뿐”(187쪽)이라는 소망엔 생명과 인생의 순환을 통찰하는 지혜가 깃들었다.



 사라지다시피 한 대가족의 풍경을 엿보며 생명의 경이로움과 가족애를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아이는 기억해줄까 한때 우리가 서로의 인간관계에서 일등이었다는 사실을.”(168쪽)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박한 문장들에 코끝이 찡해온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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