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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압구정동

중앙일보 2011.07.19 00:20 종합 35면 지면보기








여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楮子島)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다. 닥나무가 많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은 모래섬이었다. 그 뒤로 북한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광복 전까지는 한강변 여러 농촌마을 중 하나였다. 배꽃이 가득한 과수원이나 채소밭, 아니면 그냥 모래밭이었다. 6·25전쟁 후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세조 때 모사(謀士) 한명회(韓明澮)가 여기에 자신의 호를 딴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즐겼다. 지명의 유래다. 1963년에야 서울시로 편입됐다. 그전까지는 경기도였다.



 1970년대 초반 반포와 잠실에 서민용 주공아파트가 들어설 무렵 이곳에 중·상류층을 겨냥한 고급 아파트가 추진됐다.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를 시공하면서 외국에서 들여온 장비를 보관하기 위해 확보해 뒀던 땅이었다.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놓이면서 뜨기 시작했다. 여기에 ‘압구정 현대’가 들어서면서 강남시대의 막이 올랐다. 서울시의 인구분산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강북만 의미했으니까. 아파트 건설은 75년 시작됐다. 2년 전 서빙고동에서 자신감을 얻은 현대가 주택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80년대 초까지 24개 단지 1만335가구가 들어섰다. 네이버를 검색하면 이 동네엔 성형외과 578곳, 웨딩스튜디오 395곳, 웨딩숍 391곳, 연기학원 43곳 등이 있는 걸로 나온다.



 최근엔 ‘압구정 날라리’란 노래가 뜨고 있다. “셔츠가 다 젖을 때까지 압구정 / 돈이 없어도 오늘만은 날라리.” 압구정동은 오랫동안 이 땅을 눌러온 군부독재가 힘을 잃으면서 등장한 자본의 해방구 같은 곳이다. 거친 욕망이 직설적으로 분출됐고, 거기에 대중도 들떠 같이 흐느적거렸다.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991년 시인 유하는 이런 시집을 내고 2년 뒤 같은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었다. 황석영의 최신작 『강남몽』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모든 강남의 시작은 여기다.



 여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재건축이 진행된다. 지난주 서울시가 발표한 안에 따르면 40~50층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다. 10년 넘게 끌어온 프로젝트가 마침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소형아파트 의무비율을 적용하지 않는 대신 넓은 공원을 만들어 시에 기부하는 걸로 타협을 봤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절차가 남아 있어 착공까지는 3~4년 걸린다고 한다. 제2의 압구정 신화가 펼쳐질 것인가.



심상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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