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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박찬일의 음식잡설 ⑩ ‘어제의 카레’가 더 맛있다

중앙일보 2011.07.19 00:04 경제 18면 지면보기



먹다 남은 음식이 때론 최상의 맛을 낸다, 성숙한 인생처럼





루저에 대한 따스한 시선,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일본 만화 『심야식당』이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어제의 카레’는 실제 요리법이 매니어 사이에 널리 퍼질 정도다. 읽어본 이는 아시겠지만, 결코 색다르고 놀라운 요리법이 아니다. 그저 ‘시간’이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며, 인생사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경이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다.



 어제 먹다 남은 차가운 카레를 따스한 밥에 녹여 먹는다는 이 요리법은 요리와 삶의 다양한 맨얼굴을 보여준다. 요리사로서 이 에피소드는 요리의 ‘타이밍’에 대한 이해로 읽히기도 한다. 자, 팥죽이라면 후후 불어가며 먹어야 제맛이지만 푹 쪄낸 만두나 찐빵은 한 김이 빠져야 맛이 산다. 진한 감칠맛과 단맛을 혀가 잘 받아들이려면 지나치게 높은 온도에서는 적당하지 않다.



 볶음밥은 또 어떤가. 막 지은 밥으로는 맛있는 볶음밥을 절대 만들 수 없다. 냉장고 구석에 굴러다니던 수분 빠진 찬밥이라야 진짜 볶음밥의 소중한 재료로 변신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갓 지은 밥은 전분이 막 호화(糊化)된 상태여서 젤리처럼 진득하고 수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슬고슬한 건조함이 중요한 맛있는 볶음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식 쌀요리인 리조토도 기다려서 맛을 낸다. 마치 밥의 뜸을 들이듯이, 팬에 볶던 쌀이 얼추 익으면 불을 끄고 버터 한 조각을 얹음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풍미가 살아난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에도 누룽지 요리가 있다. 먹다 남은 리조토를 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져내면 멋진 요리가 되는데, 정작 리조토보다 이걸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리조토 알 살토’라고 부르는데, 살토(salto)란 영어의 ‘점프’에 해당하는 낱말. 별 볼일 없던 잔반 리조토의 도약적 변신을 의미해서 더욱 멋지게 들리는 이름이다. 눌어붙어 버려질 운명에서 한 그릇의 구수한 숭늉으로, 탕으로 되살아나는 우리의 누룽지는 두말 할 필요 없겠다.



 스테이크도 마찬가지다. 두툼한 고기는 뜨거운 열에 의해 조직이 익으면서 육즙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이때 고기를 썰면 육즙의 손실이 크다. 상온이나 따뜻한 곳에 구운 고기를 놓아두면 육즙이 고루 퍼져 손실이 적고, 풍미도 좋아진다. 그러니 스테이크가 얼른 나오지 않는다고 조르지 마시길.



 우리나라 고기 요리 중에서도 기다려서, 먹다 남은 것이어서 더 맛있어지는 게 있다. 바로 갈비다. 갓 만들어서는 절대 진짜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잔치가 끝나고 남아 있던 식은 갈비를 데워 먹을 때 우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곤 한다. 이거야말로 진짜 ‘어제의 갈비’가 아닌가(누군가 새로운 갈비찜집의 이름으로 써도 괜찮겠다).



 이탈리아 디저트의 대명사인 ‘티라미수’도 그렇다. 만들어서 이틀째 된 것이 가장 맛있는데, 커피에 적신 과자의 촉감과 향이 최대로 올라가는 시점인 까닭이다. 종종 기사나 소설에서 ‘갓 구운 빵이 맛있는’ 운운이 나오는데, 이건 좀 어색하다. 빵이든 과자든 구운 후 안정화되는 시간을 원한다. 제과점의 안쪽 부엌에 언뜻 보이는 수많은 시렁은 바로 그 빵을 식히기 위한 도구다.



 요새 커피 볶는 이가 많아졌다. 그 커피 역시 볶아서 바로 먹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에 공기를 쐬어 부드럽고 유연하며, 더 깊은 향이 나도록 놓아둔다. 세상 일이란 마구 다그쳐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만 같다. 때로는 과일도 기다려야 맛을 낸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다. 멜론이나 바나나·귤·키위 같은 남국의 과일부터 배도 숙성에 의해 더 맛이 좋아진다. 베어물면 풋내가 나는 천덕꾸러기도 시간의 마술에 의해 진한 향기를 뿜어내곤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려지고 잊힌 못난 존재의 쓸모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팔다 남은, 먹다 남은 음식이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도 그런 면모다. 기다려야 진짜 맛을 보여주는 건 꼭 요리만은 아닐 것이다.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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