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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진흙탕 속에서도 슛 던졌다 … NBA 로고가 됐다

중앙일보 2011.07.16 00:35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한국과 특별한 인연 가진 미국 프로농구 대부, 제리 웨스트
1960~2000 LA 레이커스 선수·감독·단장 역임
NBA 최다 33연승 이끈 전설
“우상이던 형, 6·25 때 죽었다 … 농구로 슬픔 달랬다”



제리 웨스트(가운데). Getty Images / 멀티비츠















미국 프로농구(NBA)의 로고는 파란색과 빨간색 바탕 사이에 흰색의 선수가 역동적인 드리블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NBA를 상징하는 그 유명한 로고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NBA 사상 최장인 33연승을 이끈 수퍼스타 제리 웨스트(73)가 바로 그다. 키 1m91㎝의 그는 선수와 감독, 단장으로서 LA 레이커스 한 구단에만 40년 동안 몸담으며 8개의 우승 반지를 낀 신화의 주인공이자 NBA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런 성공을 이루려면 불타는 열정과 굳은 신념은 필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밝은 희망을 추구하며 성공에 도달한다. 반면 어두운 상처가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이들도 있다. 웨스트는 후자 케이스였다. 그에게 암흑 같은 절망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LA 인근 퍼시픽 팔리세이즈에서 제리 웨스트를 만났다.



LA중앙일보=원용석 기자









Getty Images / 멀티비츠



형의 죽음으로 얽힌 한국과의 인연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는데.



 “6·25 60주년 기념 기도회차 한국에 갔다. 한국은 내가 형 데이비드를 잃었던 곳이다. 당시 형의 나이는 불과 스물두 살이었고, 난 열두 살이었다. 지금도 밤에 형 생각에 잠 못 이루고 식은땀을 흘릴 때가 많다.”



●형 소식을 어떻게 접했나.



 “1950년 겨울이었다. 우리 집은 당시 차가 없었다. 그래서 어디든 걸어 다녀야 했다. 우체국에 들른 뒤 집으로 가는데 누군가 나를 멈춰 서게 하더니 ‘너희 형 한국에서 죽었대’라고 말했다. 순간 온 세상이 멈춘 듯했다. 집으로 정신없이 막 뛰어갔다. 거짓말이나 농담이기를 빌었다. 집에서 한 200야드 거리 앞이었을 거다. 거기서부터 어머니가 벽을 손으로 땅땅 치며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이 나를 더욱 심한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다. 난 당시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고 할 수 있다. 전에는 나름대로 명랑했는데, 그 일 뒤론 고독한 사람이 됐다. 어머니도 너무나 많이 변해 더 슬펐다. 6남매 중 내가 다섯째이고 데이비드가 둘째였는데, 어머니가 자식들 가운데 가장 애지중지했던 게 형이었다. 그해 12월 형 장례식을 치렀다. 엄청 추운 날이었다. ‘탭스(Taps)’라는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지금도 그 노래가 나오면 절로 형 장례식이 떠오른다. 그 뒤 3개월가량 형과 관련된 편지가 계속 집으로 날아왔다. 장례식보다 편지 받을 때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형이 사망한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극복 못 한다. 그런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우리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이다. 형은 그중 가장 독실했다. 파병이 결정됐을 때 어머니는 형에게 성경을 선물했다. 형은 한국에 가는 도중 성경을 잃어버렸는데, 수소문 끝에 서울에서 성경을 다시 찾았다고 했다. 그 성경을 들고 군으로 돌아간 지 일주일 만에 형이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은 그 뒤 교회에 안 나갔다.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형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나.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가족 가운데 데이비드하고 가장 친했다. 농구도 형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어렸을 때 내 몸이 워낙 허약해 의사가 나보고 운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형이 꾸준히 농구를 해서 몸을 단련하라고 조언했다. 농구가 아니었다면 난 오랜 시간 방황했을 것이다. 사람은 슬픔에 빠지면 어딘가 다른 곳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안 그러면 자칫 미칠 수 있다. 농구는 나에게 슬픔을 잊게 해주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형 생각이 날 때마다 농구공을 잡았다.”



●한국에 가보니 어땠나.



 “비무장지대(DMZ)에도 가보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함께 평화기도회와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 농구 교실도 열었는데, 뜻 깊은 경험이었다. 형이 전사한 나라에서 농구 교실을 연 게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행이었다.”



●한국에 다시 갈 생각은 있는지.



 “한국은 내게 형이 죽은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유쾌한 기분으로 가지 못한다. 지난해에도 큰마음 먹고 간 것이다. 그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피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어쩌면 한국이 내 상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아버지가 탄광 기술자였다. 일에 지쳐 우리 6남매와 놀아줄 시간도 없었다. 지도를 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아주 가난했다. 난 몸이 너무 약해서 영양보충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다.”



●농구를 처음부터 잘했나?



 “어렸을 때 내 키가 작았다. 그래서 학교 농구부에서 벤치멤버로 출발했다. 하지만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이웃에 농구 골대가 있어서 거기서 매일 연습했다. 농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앵글에서 슛을 연마했다. 코트가 진흙탕이 되든, 눈으로 뒤덮이든 항상 연습을 했다. 한마디로 농구 중독이었다. 농구 때문에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엔 60개 대학에서 스카웃 제안이 왔다. 대학 졸업반 시절(1960년)엔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땄다.”



●시합 중 다른 선수들과 달리 욕설을 전혀 안 하기로 유명했는데.



 “데이비드,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키가 너무 작고 어려서 그들은 나와 농구하기를 싫어했다. 그때 내가 욕설을 퍼부었는데, 형이 나를 농구공으로 때리면서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후로 코트에서는 욕을 안 했다.”



●현역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난 승리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패배다. 1972년 우승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33연승을 달렸던 것도 좋은 추억거리다. 하지만 내 이력 때문에 나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사실 농구를 잘한 것 외엔 보잘것없다고 생각한다. 돈과 명예도 다 부질없다. 행복은 좋은 경험을 통해서 나오지, 돈과 명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해 DMZ에서 만난 한국 소녀들의 미소, 감독 시절 내가 지도했던 선수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아주 작지만 소중한 순간들이다.”



●교회를 더 이상 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가.



 “물론이다. 살면서 내가 매우 영적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주일 방송 설교를 종종 듣고, 기독교 서적도 많이 읽는다. 목회자, 성도들과 교류하며 말씀을 가까이한다.”



●형의 이름으로 장학금 프로그램도 마련했는데.



 “(모교인)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에 형의 이름으로 학습관을 기증했다. 얼마 전에는 컴퓨터 80대를 선물했다. 또 자선골프대회로 수익금을 올려 소수자와 소외계층을 도우려 노력한다. 베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골프광으로도 알려졌는데.



 “골프에는 인생이 함축돼 있다. 그런데 골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경쟁심이 발동한다. 프로골퍼처럼 치고 싶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 자신에게 별로 안 좋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요새는 골프를 잘 안 한다. 한때 싱글을 치기도 했다. 골프에 대한 사랑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NBA 경기보다 골프 시청 시간이 월등히 많다.”(그는 현재 PGA투어 노던 트러스트 오픈 대회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농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



●농구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얘기인가?



 “그건 아니다. 단지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나는 농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포츠는 당연히 농구다.”



●마이애미 히트의 스타 르브론 제임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일단 그가 지난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한 것에 대한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계약선수가 다른 구단에 가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그게 시장 논리인데. (프로 데뷔 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만 7년 동안 뛰었던 ①르브론 제임스는 지난해 여름 스포츠 채널 ESPN의 ‘더 디시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애미 히트 이적을 발표했는데, ‘굳이 TV를 통해 그런 발표를 할 필요가 있었나’라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르브론은 수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다. ②마이클 조던보다는 ③매직 존슨에 가깝다고 본다. 체공력은 존슨보다도 좋다. 패스까지 탁월한 데다 타고난 체격을 갖췄다. 로 포스트(골밑)에서의 능력만 좀 더 보완한다면 그가 더 훌륭한 선수로 거듭날 것이라 생각한다. 풋워크도 여전히 미숙하다.”









제리 웨스트, 데이비드 스턴 NBA 커미셔너, 팻 라일리 마이애미 사장, 제리 버스 레이커스 구단주, 미치 컵첵 레이커스 단장(왼쪽부터)이 지난 2월 17일 LA 스테이플스 센터 앞에서 열린 제리 웨스트 동상 건립식에서 동상을 보고 있다. [AP]



●(레이커스 시절) 손수 영입한 ④코비 브라이언트는?



 “그는 겁이 없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이를 철저히 무시하는 독특한 능력을 갖췄다. 또 그 정도 정신력이 있어야 수퍼스타가 되지 않겠나. 특히 풋워크는 단연 리그 최고다. 그는 무엇보다 승부처에서 돋보이길 원하는 선수다. 그게 바로 다른 선수들하고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억지로라도 결승 슛을 만들어낼 줄 아는 능력을 갖춘 게 코비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올 시즌 지나치게 들쭉날쭉했다. 그래 가지곤 절대 우승 못 한다.”



●레이커스 단장으로서 엄청난 성공을 누렸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거의 병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경기를 관전하거나 생중계로 보는 일이 없었다. 항상 녹화로 봤다. 그것도 이긴 경기만 골라서. 패배를 못 견디는 내 성미 때문이다. 나 자신을 보호하는 차원에서였다. 단장 생활을 하며 어떨 때는 내가 정말 ‘미치광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내 모습이 싫었고, 인생을 계속 그런 식으로 살기 싫어 레이커스 단장직도 그만둔 것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



 “농구 코트에서의 활약보다는 형처럼 남을 위해 베풀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난 5월부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웨스트는 현재 자서전을 집필 중이다. 올가을에 출간될 예정으로 웨스트는 “내 인생을 뒤돌아보는 책”이라며 “어두운 내용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40년간 레이커스와 운명 함께한 웨스트

NBA 사상 최고 가드 중 한 명 … 승부처서 특히 강한 면모




1938년 웨스트버지니아의 작은 마을 실얀에서 태어난 제리 웨스트는 어려서부터 깡마른 체구였고, 누구와 눈도 쉽게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극히 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농구 코트에서만큼은 불굴의 투지를 불사르며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드 중 한 명으로 거듭났다.



 현역 은퇴 뒤에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스카우트 겸 단장으로 더욱 명성을 날렸다. 그는 LA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레이커스가 연고지를 미니애폴리스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뒤 팀 성적이 곤두박질쳤을 때, 새 힘을 불어넣어준 게 바로 웨스트였다. (‘레이커스(Lakers)’라는 이름은 미니애폴리스의 호수가 1만여 개가 된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레이커스의 연고 이전 뒤 첫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된 그는 이후 40년간 레이커스의 운명을 짊어졌다. LA에서의 첫 시즌 때 36승에 그쳤던 레이커스는 웨스트의 영입과 함께 단숨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그는 데뷔 첫해인 1961∼62시즌에 평균 30.8득점을 뿜어냈고, 레이커스도 54승28패를 기록하며 그해 NBA 결승 시리즈에 진출했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그가 NBA에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웨스트는 정작 선수로서 우승이 한 번밖에 없다. NBA 파이널(결승 시리즈)에 아홉 번 올라 여덟 번 고개를 숙였다. 1969년에는 팀이 졌음에도 파이널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1∼72시즌이 최고 전성기였다. 평균 25.8점 8.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레이커스의 당시 정규 시즌 최다승인 69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72년 NBA 결승 시리즈에서 뉴욕 닉스를 격파하며 유일한 우승을 건졌다. 선수생활 내내 승부처에 특히 강했던 그는 ‘미스터 클러치(Mr. Clutch)’라는 별명도 얻었다.



 1974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1976년부터 3년 동안 레이커스 감독으로 활동한 웨스트는 이후 스카우트로 팀에 머물다 1982년 단장으로 승격됐다.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등이 이끈 ‘쇼타임’도 그의 손에 의해 탄생했고, 쇼타임은 1980, 82, 85, 87, 88년 우승을 거머쥐었다. 90년대 들어 주춤했지만 코비 브라이언트, 섀킬 오닐, 필 잭슨 감독을 영입해 레이커스의 2000~2002년 ‘3년 연속 우승’의 기틀을 마련했다. (웨스트는 레이커스와 갈라선 뒤 ‘그리즐리스’로 옮겨 2002년 우승 반지는 받지 못했다.)



j 칵테일 >>

흑인 위주 NBA, 로고 모델은 백인




미국 프로리그 로고는 메이저리그(MLB)가 최초다. MLB 출범 100주년을 기념해 1969년 만들어졌다. MLB 사무국이 라이선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품에 대한 인증을 위해 로고를 제작한 것이다. 파란색과 빨간색 바탕에 타격 직전의 선수를 흰색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1970년 NBA측 역시 자신들을 상징하는 로고의 필요성을 느꼈다. 논의 끝에 당시 인기 최고였던 LA 레이커스의 슈팅가드 제리 웨스트를 모델로 결정했다. 흑인 선수들이 판을 치던 NBA에 백인의 우상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터였다. NBA 로고가 MLB 로고를 본떠 만들어지자, MLB 로고 역시 선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로고 제작자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로고에 특별한 모델은 없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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