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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리스크 키우는 워싱턴 정쟁 … 무디스·S&P, 신용등급 강등 경고

중앙일보 2011.07.15 00:18 종합 1면 지면보기



이 장면 뒤, 오바마 나가버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공화당 베이너 하원의장(왼쪽) 등 민주·공화 지도부와 정부 부채 한도에 대해 논의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뉴시스]





13일(현지시간) 오후 6시16분 미국 백악관 캐비닛 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 대통령이 상기된 채 방을 박차고 나왔다. 조 바이든 부통령, 민주·공화 의회 지도부 8명과 함께 미 정부가 빌릴 수 있는 빚 한도의 증액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나흘째 이어진 마라톤 회의장을 뛰쳐나온 오바마는 곧장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로 돌아갔다.



 이를 두고 공화당 관계자는 “오바마가 한계에 다다랐다. 그가 ‘이 문제로 대통령직을 끝내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화를 내며 회의장을 떠났다”고 말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 마지막 발언을 하고 나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오바마가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나는 그동안 정말 많이 참았다. (계속 싸우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enough is enough)”며 “더 이상 정치적인 쇼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1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건물에 붙어 있는 시계에 국가 부채 현황이 실시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 정부 부채는 총 14조3786억4505만5279달러(약 1경5198조원), 가구당 부담액은 12만1851달러(약 1억2879만원)라고 표시돼 있다. [뉴욕 로이터=뉴시스]



 현재 미 정부의 부채 한도액인 14조3000억 달러(약 1경 5100조원)는 이미 찼다. 다음 달 2일까지 여야 합의로 한도를 증액하지 않으면 미 정부는 파산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미국의 민주·공화 양당은 당면 과제를 지혜롭게 풀지 못하고 정쟁에 매달리는 바람에 경제 부문에서 이처럼 ‘미국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민주·공화 양당의 대치가 극한으로 치닫자 이날 세계적인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미국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negative)’으로 강등했다. 무디스는 13일(현지시간) 미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로 강등한 데 이어 민주·공화 양당이 정부 부채 한도 증액에 조속히 합의하지 않으면 현재 최고등급 ‘Aaa’인 미국의 신용등급을 깎겠다고 경고까지 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미 정부의 어떤 지불유예에도 신용등급을 낮추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고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14일 보도했다. 다음 달 2일까지 한도를 증액하자면 의회는 늦어도 22일까지는 합의안을 마련해야 한다. 법안 통과와 대통령 서명 등 절차에 시간이 필요해서다.



지금 미국은 다급한 상황이다. 다음 달 2일까지 민주·공화 양당이 부채한도액에 합의하지 않으면 미 연방정부가 마비되는 것은 물론 세계 경제에도 메가톤급 충격이 밀어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유럽의 금융 불안도 더욱 확산될 것이다.



공화·민주 양당이 부채한도액에 합의하지 않 고 ‘치킨 게임’을 하고 있다. 13일(현지시간)의 공화·민주 양당의 백악관 협상 실패에 대해 양측은 서로 비난하고 있다. 공화당 관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화를 내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갑자기 협상이 끝나 버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오히려 공화당 에릭 캔터(Eric Cantor) 하원 원내대표에게 화살을 돌렸다. 오바마와 공화당 존 베이너(John Boehner) 하원의장 사이에 의견이 좁혀질 때마다 캔터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협상이 공전했다는 것이다. 캔터는 협상 시한이 너무 촉박한 만큼 일단 3~6개월짜리 임시 합의안을 만든 뒤 시간을 두고 본협상을 하자는 주장을 고집했다. 더욱이 캔터는 오바마의 말을 세 번이나 잘라 오바마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참다 못한 오바마는 “임시방편으로 넘어갈 순 없다”며 “에릭, 나의 엄포를 자초하지 말라”고 소리쳤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면 대통령이 하원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경고성 발언이었던 셈이다. 캔터는 회의 후 “대통령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적이 없다”며 “나는 단지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정부 부채 한도 증액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극한 대립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 시절엔 공수가 바뀌었다. 잇따른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정부 빚이 눈덩이처럼 불자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부시는 의회에 부채 한도 증액을 요청했다.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오바마는 “정부 빚 한도를 늘려 달라는 건 리더십의 실패”라며 앞장서 반대했다. 결국 민주당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져 정부 부채 한도 증액안은 찬성 52대 반대 48표로 가까스로 상원을 통과했다.



 이번엔 공화당이 오바마의 ‘아킬레스건’을 잡았다. 공화당은 ‘빚더미에 올라앉은 정부’라는 이슈를 내년 대통령선거 때까지 끌고 가자는 속셈이다. 오바마의 경제 실정을 이보다 명료하게 부각할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 달 2일 이전까지 한도 증액을 해주지 않으면 미국 국채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가 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캔터가 3~6개월짜리 임시안을 들고 나온 건 파국은 피하면서 오바마를 계속 압박하자는 계산이다. 이와 달리 오바마가 이날 회의장을 박차며 “대통령직까지 걸겠다”고 배수의 진을 친 건 이 같은 공화당의 수에 말리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뉴욕·워싱턴=정경민·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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