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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부른 이종용 목사 교회서 윤형주 세시봉 공연

중앙일보 2011.07.15 00:17 종합 27면 지면보기



세시봉시대 동료 겸 형·아우
LA교회 31일 간증집회 초청



사진은 이종용 목사의 장남 철호(25)씨가 찍었다. ‘가수 이종용’은 본인에게는 옛 추억이었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현재였다.



1975년 ‘너’라는 노래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당시 가요 순위 프로그램 8개월 연속 1위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세시봉 시대 통기타 가수 이종용이 부른 노래다. 이후 발표한 ‘바보처럼 살았군요’ ‘겨울아이’도 여전히 인기다.



 한국을 떠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이종용(61)은 목사로 26년째 살고 있다. 82년 홀연 미국으로 가 텍사스주의 작은 신학교에 입학했다. 85년 목회를 시작해 8년 만인 93년 LA에 코너스톤 교회를 세웠다.



 그의 교회에서는 31일(현지시간) 윤형주를 초청해 간증집회를 연다. 세시봉 열풍에 대해 한마디 들으려고 그를 만났다. 예순이 넘었지만 청바지에 티셔츠, 희끗한 머리와 그가 모는 10년 된 중고차는 복고풍 패션처럼 자연스럽고 멋지게 잘 어울렸다.



 - 세시봉 시대 대표 가수가 아닌가.



 “시대는 같지만 난 세시봉 출신이 아니다. 서울 무교동에 세시봉이 있다면, 종로 YMCA에는 ‘청개구리의 집’이 있었다. 난 거기서 ‘사랑해’를 불렀고, 김민기는 ‘아침이슬’, 김도향의 투코리안스는 ‘벽오동’을 불렀다.”



 - 지금 세시봉 열풍이 부럽지는 않나.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 인기는 잠시일 뿐, 나는 생명을 구하고 있지 않나.”



 - 세시봉 열풍을 평가한다면.



 “좋은 바람(風)이다. 아이돌 그룹들이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양 비춰졌는데, 무대는 풍성해야 한다. 세시봉 열풍은 풍성한 문화로 가는 첫발을 내딛게 했다.”



 - 윤형주씨가 31일 코너스톤 교회에서 단독 공연을 한다.



 “인연이 각별하다(그는 ‘형주 형’이라고 불렀다). 동료 가수이기도 하지만 구치소 동기이자 신앙의 동반자다. 120일 동안 차가운 감방에 있으면서 함께 신앙을 되찾았다. 벌써 36년 전 사건이다.”



 - 젊은 세대는 ‘그 사건’을 잘 모른다.



 “75년 12월 3일이다. 연예인 200여 명이 줄줄이 붙잡혀 들어갔던 대마초 사범 일제단속의 구속 1호가 나, 윤형주, 이장희였다.”



 - 한참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아닌가.



 “체포된 날 8개월 연속 1위 가수로 황금 트로피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상 대신 수갑을 찼다. 대마초를 피우지 않았던 내게는 ‘공급책’이라는 죄명이 붙었다. 그때 마약사범이라면 가수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 어떻게 재기했나.



 “4년간 출연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러다 79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주인공 예수 역을 맡게 됐다. 당시 처음으로 흑자를 낸 뮤지컬 공연으로 연일 흥행을 이뤘다. 윤복희·최주봉·유인촌·곽규석이 함께 출연했다. 무용수였던 박상원은 막내로 나중에 합류했다.”



 - 왜 목사가 되려 했나.



 “수퍼스타를 하는 동안 예수에 젖어 살았다. 무대에서 예수 이상 가는 역할이 어디 있겠나. 다른 것은 재미 없어지더라.”



 - 가수 출신이어서 목회가 쉬웠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대중은 연예인을 좋아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연예인과 목사는 성향이 정반대다. 연예인은 어떻게든 자기를 드러내 각인시켜야 살아남는다. 반면 목사는 날마다 죽어야 산다. 나는 빠지고 하나님과 성도들만 드러나야 한다. 가수였던 내게 나를 죽이는 일은 전쟁과 같다. 지금도 그렇다.”



 - 목사로서 꿈은.



 “목사가 내 꿈을 꾸면 되겠는가. 하나님의 꿈을 항상 구해야 한다. ”



LA지사=정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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