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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망명한 이건승·홍승헌, 독립운동 씨앗 뿌리다

중앙선데이 2011.07.10 02:34 226호 30면 지면보기
이건창 생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이건창과 생시에 교유했던 양명학자들은 황현처럼 자결하거나 정원하·홍승헌·이건승처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③ 만주 횡도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10년 9월 26일 강화도에서 개성의 원초 왕성순의 집에 도착한 이건승은 진천에서 문원(紋園) 홍승헌(洪承憲)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개성은 상해 북방 남통(南通)으로 망명한 창강 김택영의 고향이었고, 왕성순은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양명학자 김택영은 먼저 배를 타고 남통으로 망명하면서 고려·조선의 문장가 9인(김부식·이제현·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의 글을 모은 구가문(九家文)을 왕성순에게 주었다. 왕성순은 1914년 여기에 김택영의 글을 더해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9214>)를 만들고 그 서문에 “창강(滄江) 김택영 선생이 개성에서 우뚝 일어나 고문(古文)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칭송했다. 청나라의 학자이자 개혁정치가였던 양계초(梁啓超)도 이 책에 “한 나라의 국민성은 문학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다.

10월 초하루 진천의 홍승헌이 왕성순의 집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이건승의 종제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조카 범하도 당도했다. 원래는 이건방도 망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두 떠나버리면 조선 양명학을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누군가는 식민의 땅에라도 살아남아서 양명학을 전수해야 했다. 이미 생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승은 을사년(1905) 가족들의 저지로 자결에 실패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다가, “내가 비록 방 안에서 말라 죽은들(瘦死) 무슨 이익이 있으랴”면서 의연히 일어나 학교를 건립했다고 회고했다. 그 학교가 이건승이 1906년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설립한 계명의숙(啓明義塾)이었다. 자결이 단기전이라면 저항은 장기전이었다. 학문으로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교육으로 먼 미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남아야 했다. 그 덕분에 일제 식민사학을 비롯해 일제에 들러붙은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위당 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10월 2일 밤 이건승과 홍승헌은 개성 성서역에서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왕성순과 이건방, 조카 이범하는 만주로 떠나는 두 선비를 배웅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심정은 같았다. 열차에 몸을 싣고 먼 북방으로 떠나는 홍승헌은 전통 명가 출신의 사대부였다.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후손이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이었다. 홍양호는 영조 40년(1764)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벚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벚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洪翼周)는 충청도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진천에도 터를 잡았다. 진천이 강화도와 함께 조선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건승·홍승헌보다 조금 늦게 망명하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홍승헌을 홍 참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홍승헌은 고종 27년(1891) 현재의 검찰총장 격인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같은 해 종2품 이조참판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이상설 생가 및 생가 마을. 충북 진천읍 산척리에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와 정원하의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며 양명학의 반향이 되었다. 이상설도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승·홍승헌은 10월 3일 밤 신의주 종점에서 하차했다. 일제가 만주 망명을 막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어서 쉽게 도강할 수 없었다. 두 망명객은 사막촌(四幕村) 주막에 몸을 숨긴 채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사막촌 주막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지사들의 비밀 거처였다.

만주에는 이미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가 망명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하도 홍승헌 못지않은 명가 출신이었다. 현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정유성(鄭維城)이 8대조, 강화학의 비조(鼻祖)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6대조다.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까지 올랐고, 부친 정기석(鄭箕錫)도 지평현감과 안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정원하가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했을 때 지금의 서대문에서 반송방(盤松坊:아현동·현저동 부근) 집까지 축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면서 진천에 살았던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 승지, 대사헌 같은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요상하게 돌아가면서 정원하는 벼슬을 집어던진다. 벼슬을 그만둔 정원하는 선조의 고향인 강화도로 들어가 홍승헌·이건창 형제 등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이건창은 ‘난고(亂藁)’라는 시의 서문에서 정원하와 홍승헌은 진천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강화도 하현(霞峴:하곡)에 도착해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문집인 명미당집(明美堂集) 곳곳에 두 사람과의 우정과 학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건창도 살아있었다면 정원하·이건승·홍승헌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을 인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자 정원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명을 결심했다.

이건승·홍문헌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은 몸은 죽고 정신이 사는 길이고, 현실에서는 죽고 역사에서는 사는 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광복(光復)은커녕 그 조짐도 찾기 어려웠다. 왕실 일부와 집권당 노론이 조직적으로 매국에 나선 나라였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이란 작전명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삼남 일대의 의병들을 그물 치듯 살육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길이 성현들의 글을 읽은 인간 세상 식자(識者)의 길이었다. 정원하에겐 떠나기에 앞서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린 손녀들의 혼처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5세 장손녀를 생전의 약조대로 이건창의 장손자 이덕상(李德商)에게 출가시키고 12세 손녀는 옥천군 청산리 조동식(趙東式)의 집안으로 시집 보냈다. 모두 세교(世交)가 있던 소론가 집안이었다. 정인보의 제자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열두 살, 아니 열한 살 어린 신부가 문의(文義)현 대원산(大圓山)에서 청산리까지 신행길 가마에서 내리는데 하도 어리고 키가 낮아서 연지곤지 찍고 종종걸음으로 서서 걸어 나오더라”는 일화를 전해준다. 이렇게 주변 정리를 마친 정원하가 가장 먼저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이미 만 55세의 장년이었다.

이건승과 홍승헌이 신의주 사막촌에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리던 10월 7일 일제는 76명의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른바 ‘합방공로작’이었다. 다음날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 친임관(親任官)·칙임관(勅任官) 등의 대한제국 전 관료와 양반·유생들에게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었다.

유림(儒林)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회상기(<8E84>翁七十三年回想記)에서 “그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김창숙은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돈에 팔려서 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바로 개돼지다. 명색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끼어든단 말이냐?’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늘 “나라가 망하기 전 사대부가 먼저 망해서/양정에 춤추는 자들 대부분 최가, 노가더라(亡國先亡士大夫 梁庭舞蹈半崔盧)”라는 시구를 읊으며 통곡했다고 말했다.

이 시는 매천 황현의 ‘형저기우(荊渚騎牛)’인데 당(唐)나라가 망했는데 귀족인 최씨, 노씨들이 양(梁)나라에 붙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노론 유력 가문 출신들이 매국에 앞장선 것을 비판하는 황현의 시가 김창숙 같은 지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매국에 앞장선 이들의 것이었다.

12월 초하루 새벽 이건승과 홍승헌은 중국인이 끄는 썰매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대안 안동현(현재 단동) 구련성(九連城)에서 이국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 두 선비는 북상길에 올랐고 12월 7일 첫 목표지인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흥도촌(興道村), 항도촌(恒道村)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올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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