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에 소련 공산당 지부 세워라” … 레닌, 마린에 지령

중앙선데이 2011.07.10 02:25 226호 33면 지면보기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의 마지막 회의는 7월 31일 사진에 보이는 자싱(嘉興)의 유람지 난후(南湖)의 호화 놀잇배(畵舫)에서 열린 뒤 산회했다. 개막 회의는 1921년 7월 23일 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베이러루(貝勒路)에 있는 동맹회(同盟會) 원로 리수청의 집에서 열렸다. [김명호 제공]
1919년 5·4 운동을 계기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중국 하늘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중순, 상인으로 변장한 베이징대학 문과대학장 천두슈(陳獨秀·진독수)와 도서관장 리다자오(李大釗·이대교)를 태운 마차가 베이징(北京)성 자오양(朝陽)문을 빠져나갔다. 당시 천두슈는 보석 중이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샛길만 이용했다. 목적지 톈진(天津)까지 가는 동안 중국에 공산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천두슈는 상하이(上海)로 떠나고, 리다자오는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5>

6개월 후, 중국 공산당 최초의 조직인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小組)’가 발족했다. 이어서 외국어학사도 설립했다. 청년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런비스(任弼時·임필시), 커칭스(柯慶施·가경시)를 비롯해 후일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뤄이농(羅亦農·나역농), 신중국 해군의 대부 사오징광(蕭勁光·소경광) 등이 몰려들었다.

10월이 되자 베이징에도 소조가 출범했다. 정식 명칭이 중국공산당 베이징지부였다는 사람도 있고 소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소조원들은 각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직 설립을 권했다. 후난(湖南)·후베이(湖北)·산둥(山東)·광둥(廣東)이 뒤를 이었다. 일본 유학생 스춘통(施存統·시존통)과 저우푸하이(周佛海·주불해), 프랑스에 유학 중인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 리펑의 외삼촌),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도 현지에서 소조를 구성했다. 두 곳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칭도 공산당, 맑스주의 연구회, 공산당 소조, 사회당 등 뒤죽박죽이었다.

창당대회 회의 참석자들을 자싱으로 안내한 리다의 부인 왕후이우(王會悟).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겁 없는 여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920년 8월, 레닌은 코민테른 집행위원 마린을 모스크바로 호출했다.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지령을 내렸다. “중국에 소련공산당 지부를 설립해야 한다. 각지에 산재한 소조들을 통합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듬해 5월, 네덜란드 외교부는 중국 주재 공사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네덜란드 출신 적색분자가 극동으로 향하는 선박에 탑승했다. 6월 초 상하이에 도착한다. 극히 위험한 인물이다. 중국 측에 통보해라.”

마린은 중국과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수없이 왕래한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열차,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리, 하얼빈, 베이징, 상하이로 연결되는 ‘홍색 실크로드’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택했다. 6월 3일, 수에즈 운하와 홍해, 인도양, 싱가포르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 소재 코민테른 원동(遠東) 서기처가 파견한 니콜스키도 상하이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린과 니콜스키는 상하이 소조 대리서기 리다(李達·이달)와 리한준(李漢俊·이한준)을 접촉했다.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며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당의 성립을 선포하자고 건의했다. “조직은 돈”이라며 돈뭉치도 건넸다.

리다는 각 성의 소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1차 중국공산당 대표자 대회를 상하이에서 개최한다. 2명씩 참석해라. 개막일은 7월 1일이다.” 마린은 “상하이 도착과 동시에 100원을 주고, 돌아갈 때 50원을 지급한다”는 말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우겼다.

7월 23일, 토요일 저녁 8시, 리수청(李書城·이서성), 리한준 형제의 집에 15명이 모였다. 리다자오는 학기말 성적을 내느라 베이징을 떠나지 못했고, 광둥성 교육청장으로 가있던 천두슈는 사람을 대신 보냈다. 참석자들의 평균 나이 28세, 아주 젊은 회의가 시작됐다. (계속)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