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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연상 유부남 이광수와 두려움 없는 사랑

중앙선데이 2011.07.10 00:58 226호 9면 지면보기
1984년 무렵의 소설가 박화성. [중앙포토]
한국 여성문단의 인맥과 서열을 파악하려면 한국여성문학인회 역대 회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65년 9월 창립된 여성문학인회는 창립 이후 오랫동안 여성 문인들의 연령과 등단 시기 그리고 작품 활동 등을 종합한 천거로써 그 순서대로 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박화성이 초대 회장을 지낸 후 최정희, 모윤숙, 임옥인, 손소희, 전숙희, 조경희, 한무숙, 강신재, 홍윤숙, 김남조 등이 차례로 회장을 역임했고 그것이 곧 한국 여성문단의 서열이었다. 박화성은 88년 1월 30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여성문단의 최고 원로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18> 1세대 여류작가 박화성

하지만 박화성이 오랜 세월 한국 여성문단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연령이 가장 높다거나 20년대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한 유일한 여성 소설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여성문인들에게는 모범이었고 귀감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나도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그의 집을 방문하면 그는 손님을 거실에 기다리게 해놓고 오랫동안 안방에서 옷매무새랑 얼굴·머리 모양 따위를 세심하게 가다듬은 다음에야 손님을 맞는 것이 습관이었다. 박화성의 그런 풍모를 손소희는 이렇게 표현했다. “…안경 속의 차가운 눈빛도 그렇고 엄격한 정형률을 연상케도 하는 그분의 단정한 외모와 그 외모를 보호하고 있는 그 매무새에서도 전연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인상이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박화성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말년에 보여준 그런 풍모와는 사뭇 다른 여러 가지 모습을 쉽게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1904년 전남 목포의 선창가 객주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박화성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자유분방한 기질이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읽는가 하면 7, 8세 때부터 ‘삼국지’ ‘홍루몽’ 등 중국의 고전소설을 독파하고,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 때인 열대여섯에 ‘유랑의 소녀’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는 등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에 편입해 다니다가 이 학교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위기가 싫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옮긴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박화성은 21세 때인 25년 1월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소설 ‘추석 전야’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그때 이광수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급속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20대 처녀의 몸으로 12세 연상인 기혼의 이광수를 좋아했던 일만으로도 박화성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몇 년 뒤 모윤숙이 등단하면서 세 사람이 삼각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후에 박화성이 회고의 글 가운데서도 밝힌 적이 있다. 박화성은 26년 숙명여고보 개교 이후 최고의 성적인 평균 98점으로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여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 무렵 틈틈이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한 박화성은 28년 1월 결성된 여성 항일 구국운동 단체인 ‘근우회’ 도쿄 지부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렵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그와 같은 사상적 성향은 사회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오빠 박제민의 영향이었다. 박화성은 그 오빠를 모델로 한 소설 ‘북국의 여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30년 그 오빠와 절친한 친구이며 성향이 비슷한 김국진과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그 이후 ‘하수도 공사’와 장편 ‘백화’ 등 주요 작품을 발표하지만 김국진과의 불화가 갈수록 깊어져 37년 파경을 겪게 되었다. 같은 해 박화성은 목포 지방 굴지의 사업가이던 천독근과 재혼했다. 천독근은 일찍부터 박화성을 연모해 자살 소동까지 벌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박화성은 재혼하면서 일제 말기의 혼란기를 피해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 광복까지 작품 활동도 접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박화성의 세 아들은 모두 문단에 진출해 소설가인 맏며느리와 함께 ‘문학 가족’을 이루었다. 38년 출생한 천승준은 문학평론가, 아내인 이규희는 63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서 ‘속솔이뜸의 댕이’가 당선해 등단한 소설가다. 둘째 천승세는 소설가, 셋째 천승걸은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다. 한데 그들 형제관계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둘째인 천승세는 호적상 39년생으로 등재돼 있지만 그는 오랫동안 32년생으로 행세해 왔고, 문단에서도 그것을 인정해 왔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취미가 같았던 탓에 나는 70년대 초부터 천승세와 ‘형’ ‘아우’로 호칭하며 서로의 집을 오갈 정도로 친숙하게 지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호적상의 나이보다 일곱 살이 많다고 말했고, 그렇게 된 사연까지 낱낱이 털어놨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8년 입학 동기생들 가운데는 김주영, 이근배, 홍기삼, 유현종, 김문수 등 문인이 많았지만 천승세는 그들 동기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보다 7, 8세 위인 이호철(32년생), 고은(33년생) 등과 말을 트고 지냈다. 대학 동기생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이호철, 고은 등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32년생인 것은 맞다’고 단언했다.

박화성·천승세 모자의 파묻힌 사연 중 일부가 신문지상에 처음 공개된 것은 박화성이 타계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 4월이었다. 국민일보 정철훈 전문기자의 천승세 인터뷰 기사다.
천승세가 네댓 살 때 박화성이 재혼했다는 것도, 목포 근처의 어떤 섬에서 살던 소년 시절 어머니가 이따금 찾아와 만났다는 것도, 어머니와 평생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모두 70년대 초 내가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다. 특히 함께 게재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목포의 박화성 문학관에 전시된 이 사진은 42년 박화성·천독근 부부와 세 아들이 함께 찍은 것인데 천승세가 천승준보다 네댓 살 위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출생 시기야 어떻든 천승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니는 나에게 또 다른 ‘하늘’이었음을 깨달았다”며 어머니와의 화해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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